99 수능 수험표 발견하다.

수험표를 통해 내가 경험한 99년

by 그루터기

여름휴가 때 고향집으로 갔었다. 노인들만 사는 집이라 오래된 물건은 종종 자녀들 와서 크게 털어주고 오고는 하는데 어머니께서 앨범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내가 사는 집으로 가져가자니 집이 좁아서 일단 그냥 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소복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니 아들이 아빠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해서 펼쳐 보게 놔두고는 나도 같이 보았다. 옛날 사진, 상장 그리고 생활 통지표도 있었다. 그러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노란 종이를 발견했다. 이걸 발견하자 나는 가슴이 다 설레었다. 수능 수험표다.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뭘 그런 걸 보여주냐는 표정이었다. 이 수험표에는 내게 수많은 얘기가 담겨있다는 것을 아내는 알아차려 주지 않아 살짝 섭섭했다. 수험표를 보면서 그때 내가 경험한 수능은 어땠나를 보여 주고 싶다.

수험표앞면.jpg 99학년도 수능 수험표

1. 6차 교육과정 첫 수능

99 수능은 6차 교육과정을 적용받는 세대의 첫 수능이었다. 나 같은 재수생에게는 배울 내용이 줄어들었다는 점이 마음에 작은 위로였다. 98 수능 때는 사회문화, 세계지리, 국민윤리, 세계사, 정치·경제 이 모든 게 필수였다. 99 수능에서는 인문계 학생들은 사회과목 중 하나만 고르면 됐다. 공부하다 답답하면 머리를 식히려 세계사 교과서를 폈던 나이기에 세계사를 선택했었다. 당시 재수생들은 각자 제일 자신 있는 과목 하나를 선택했었다. 특히 내 친구들은 주로 사회·문화를 선택했던 거로 기억한다. 우리 형 친구는 고대 경제학과 3학년인가를 다니다 나와 같은 시기에 다시 수능을 봤는데 선택과목을 경제로 선택하고 공부 안 하고 만점 받았다 들었다. 정말 부러웠다. 그 형 서울대 가기는 했다.


2. 증명사진 얇게 붙이기

수험표 사진에는 직인도 찍고, 철인도 해야 해서 사진을 얇게 붙여야 했다. 사진을 붙일 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사진의 모서리를 살짝 칼로 떠서 얇게 만드는 것이다. 고 3 때 내 짝은 손톱도 짧고 손가락이 너무 뭉뚝한 편이라 이게 잘 안 되었다. 내 짝이 사진을 붙이던 모습이 답답했던지 우리 담임 선생님은 욕 한 바기지 하시고는 대신 붙여 주시려 했었다. 선생님은 너무나 얇게 떠낸 사진에 풀을 바르시다 사진이 구겨져 선생님도 살짝 체면 구기셨었다.


3. 98 프랑스 월드컵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보면 98 월드컵 앰블럼이 그려져 있다. 모든 남자 수험생의 적, 축구 월드컵이 개막했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축구선수 말고는 잘 몰라서, 3 경기만 보는데 그쳐서 내 재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했던 내 재수생 친구는 브라질 호나우두의 반달 머리를 흉내 내고 학원에 왔었다.

제목 없음.png 반달 머리 한 호나우두


3. 홈경기를 치른 나

나는 내 모교에서 수능을 봤다. 서울 사는 재수생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했다. 그게 가능하냐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너무 큰 거 아니냐고 불공평하다고 부러워했다. 원래 재수생들은 전국 어디든 지역교육청에 접수하고 시험을 보면 되지만 나는 홈그라운드의 도움을 보려고 고향에서 원서접수를 했다. 내 고향에서는 읍내에 있는 큰 중고등학교 몇 군데를 지정하여 남녀별, 계열별로 고사장으로 활용했다. 특히 인문계 시험 장소는 내 모교였다. 그 날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크기는 했다. 예비소집 때부터 시험 당일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나를 가르치시던 선생님들께서 나를 알아보시고는 격려를 해 주셨다. 나는 내가 공부했던 건물에서 시험을 봤으며, 심지어 화장실 냄새도 친숙했다.


4. 4점짜리가 없는 수리탐구Ⅰ

수리탐구Ⅰ(수학). 수학은 늘 4점짜리라는 어려운 관문이 늘 있었는데, 4점짜리가 없어서 살짝 당황했다. 몇 개를 틀렸는지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으나 정확히 기억나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피아노 건반과 지수함수가 결합된 문제였다. 반음의 의미를 알았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때는 몰랐다. 반음이라는 말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는데 그 의미는 전혀 몰랐다. 피아노를 배운 녀석들은 좀 더 쉽게 답에 접근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피아노를 좀 칠 줄 아는데 풀이과정이 완전히 옳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지금은 맞췄다. 아, 3점 아쉽다.

제목 없음1.png 99 수능 인문계 홀수형 23번 문제와 최근에 풀어본 나의 풀이과정


5. 수험표 뒷면에 정답을 적었다.

가채점을 위해 늘 수험표 뒷면에 정답을 적어 두고는 했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모두 회수했기 때문이다. 문제 풀기도 바빠서 기록을 안 한다는 학생도 있고, 기록하는 시간 동안 틀린 문제없는지 검토하는 게 낫다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가채점 결과를 최대한 정확히 해서 특차나 정시 때 어느 대학을 지원하고 준비할지 계획을 세우기 위해 기록했다. 참고로 고 3 때 우리 반 친구는 시험지를 다시 보면 자기가 쓴 답을 다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찍은 답은 기억을 잘 기억을 못 했다고 후회의 표현을 들었다.

제목 없음2.png 수험표 뒷면에 적어둔 정답

6. 빨간 볼펜은 OMR카드에 표시해도 됐다.

그때는 OMR 답안지 정답 번호에 빨간 볼펜으로 체크를 해두었다가 컴싸로 표시해도 됐었다. 빨간 볼펜은 OMR카드 리더기가 못 읽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시험을 마친 후 시험지는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랐었다. 나도 빨갛게 달아올랐고.


7. 가채점은 EBS 방송으로

시험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 먹고 나면, EBS에서 문제 풀이를 해줬다. 지금은 꽤 유명한 사교육 업체 대표분께서 문제풀이 했었다. 은근 축구 중계 못지않게 쫄깃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8. 아날로그 손목시계에 사인펜으로 시험 종료 시간을 표시했다.

요즘은 전자시계를 들고 들어가면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괜찮았다. 다만, 시간을 잘못 보는 보는 경우가 있어서 시계 유리면에 검정 사인펜으로 시험 종료 시간을 그려 놓고 시험을 봤다. 예를 들어 언어영역 종료시각이 10시 10분이면 분침이 가리킬 시각을 표시해뒀다. 친구들은 시계에 무슨 짓이냐 했지만 실수를 줄이기 위해 얻어낸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수능날 들고 간 내 시계

9. 점심 먹고 자양강장제 한 병으로 피로야 물러가라.

생물 선생님께서 주셨던 꿀팁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시험시간이 4시간이 남는데, 시험 보기 직전에 자양강장제 한 병이면 4시간만큼은 피로도를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3교시 시험 시작 직전 박 OO 한 병을 한 입에 털고 시험을 봤다. 약물 복용이지만, 체육이 아니니까 괜찮다.


얼마 전 교육부 장관의 수능 관련 기자회견을 보았다. 정말 올해 수능 수험생들 정말 불쌍한 아이들이다. 특히나 이번 수능 보는 애들 중 30명은 가르쳤던 아이들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이럴 때일수록 '에이, 몰라 될 대로 돼라' 보다는 '난 끝까지 포기 못해'의 마음을 품었으면 한다. 포기 안 하는 쪽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그리고 실패했어도 최선을 다한 그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다. 나 역시 강력한 의지를 품고도 노력했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었었다. 하지만 빠르게 회복했고 나의 노력은 더 정밀하고 지속적이었으며 결국은 만족할 만 결과를 얻어냈다. 교육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 수험생들이 이 위기의 시대를 잘 버텨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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