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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Sep 05. 2022

위로와 공감

소통의 힘

장도연이라는 연예인에 대해 특별히 느끼는 감정은 없었다. 과거에는... 그저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큰 키와 마른 몸매를 활용하여 패션모델의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개그에 일가견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양세찬이라는 천부적인 개그맨과 호흡이 잘 맞아 두 사람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코너를 즐겨 보기도 하였다. 그 정도였다. 그녀에 대하여 과한 팬심도, 불편한 거부감도 내겐 없었다.


언젠가부터 예능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더니 상당한 인지도를 구가하는 연예인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지점에서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반려견 행동 교정을 진행하는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한 장면에서 나는 그녀에게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친구가 굉장한 공감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방송인에게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날 방송에서는 무지개다리를 건넌 이경규의 반려견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오랫동안 키운 반려견을 떠나보낸 이경규의 사연을 알게 된 장도연은 울상이 된 얼굴로 짧게 우는 소리를 내더니, 누가 봐도 의기소침해 있는 이경규의 어깨를 아주 가볍게 만져주었다. 이때 이경규와 장도연의 얼굴에는 진심이 묻어났고, 대선배인 이경규가 까마득한 후배 장도연의 손길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둘에게 깊이 공감해버렸다.


평소 이경규라는 방송인의 이미지는 다정하고 살뜰하지 않다.(물론 방송에서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조차 장도연의 진심 어린 위로에 잠시나마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그 짧은 순간 그 둘은 선후배도, 동료도, 경쟁자도 그 무엇도 아니라 그저 공감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관계였던 것이다. 사람만이 사람과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 이 장면을 대체할 존재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경규의 어깨에 손을 올린 장도연은 진정성 있는 공감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성인지를 나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 손길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저 슬픔에 잠긴 한 사람에게 온기를 전해주기에는 충분하였다. 그 단순한 행동에 이경규는 놀라기보다는 진심으로 위로받고 있었다. 이 찰나의 장면이 내게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장도연이라는 방송인의 찐 팬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인터넷 기사에서 우연히 이런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후배 장도연의 고민에 대해 이경규가 자문을 해 준 이야기였다. 어떤 프로그램에 등장한 내용인지는 모른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19금 성인 대상 개그가 대세가 되는 방송가의 트렌드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도연에게 이경규가 해준 말이었다. 19금 개그는 잘못했다가는 역풍을 맡기 쉽다. 그래서 수위조절과 소재를 잘 취사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특정인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모욕감을 줄 수 있는 것인지를 가려야 하는데 즉흥적인 순발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자칫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이들도 제법 많은 편이다. 이때 이경규가 선배로서 장도연에게 해준 조언은 이랬다. '넌 굳이 성인개그를 할 필요가 없다. 넌 그것을 안 해도 충분히 시청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많은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아마도 이경규는 전부터 후배 장도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잠재력이나 공감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조언이 가능했으리라. 그날 방송에서 장도연과 같은 행동은 제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도 흉내 낼 수 없다. '지니'나 '시리'도 인간의 감정을 맞춰줄진 몰라도 진정성 있는 위로와 공감을 해 줄 수는 없다. 심지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반려견조차도 말이다.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의 인간들은 공감과 위로를 받고만 싶어 한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어찌 타인의 위로를 바라는가? 문득 어제 본 드라마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인간은 자기랑 비슷한 부류에게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즉, 비슷한 부류가 아니면 그들의 처지와 사정과 감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말하는 비슷한 부류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이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구차스러운 행동에 짜증을 내고 그들을 따돌린다는 거다.


드라마에서는 125만 원을 가불 해달라는, 찢어지게 가난한 주인공에게 직장상사가 이런 말을 했다.


'거절해야 하는 내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부탁을 하는 너는 참 무례하구나...'


물론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자극적인 설정이다. 그런데 그들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 앙뜨와네트가 아니다. 즉 구중궁궐에서 곱게만 커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차갑고 매정한 말을 내뱉는 이는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공감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이랑 비슷한 부류란 침팬지나 오랑우탄이다. 인간끼리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이다. 인종 간에 그런 이야기를 해도 몰매를 맞는 세상에서 어떻게 한 직장에서 비슷한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가 있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모든 구분은 구별을 낳고 모든 구별은 차별을 낳는다. 그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편을 거부한 지독한 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당함을 정당함으로 포장하는 이들에게만큼은 공감하지 말자. 위로하지 말자. 그들의 억지스러움과 뻔뻔함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개는 훌륭하다'라는 방송을 볼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만 훌륭한 것이 아닌지...


* Image from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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