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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ug 26. 2022

단조롭게 성실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기쁨(2014.02.15)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대박을 친 후로 한동안 비숫한 형식의 패러디 표현이 난무했었다. 대중의 트렌드는 언제나 다수의 관심사에 쏠리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미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영화의 제목을 들먹이는 건 이 영화가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탓이 아니라 요즘의 내 삶을 비춰볼 때마다 이 영화 제목이 반복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제목과 내 삶의 유사성은 없다. 영화가 딱히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색다른 표현의 제목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솔직히 좀 생뚱맞았다. 웹툰 원작 탓인지는 모르지만 김수현이란 뛰어난 배우의 원톱 주연작이라는 사실 외에는 장르를 넘나들 듯 코미디, 액션, 게다가 신파까지 종합 선물세트를 방불케 하는 전개에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주인공이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덜 떨어진)을 확인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비 오는 날 골목에서 노상방분('뇨' 아님)을 하는 장면은 차라리 만화로 처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설날특집 TV방영분을 잠깐 보고는 배우 한 명의 티켓파워가 영화의 흥행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각설하고,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결국 위대함을 추구하는 명예로운 인민군 전사의 은밀한 위장 행각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은밀할 뿐 아니라 구질구질할 정도로 지질하게 삶을 위장한다. 그들이 그 모든 지질함을 감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자신들이 위대하고 명예로운 전사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삶은 영화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면서 국가와 인류를 유지시켜 준 중요하고 지배적인 철학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린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소소한 욕망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 주거나 더 거룩하게는 불특정 한 인류애에 공헌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사실은 '지질하게 위대하게'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이 영화는 그들의 진지한 지질함에서 그리고 스치듯 보여주는 평범한 인간미에서 거역할 수 없는 세상에 맞서 순수하게 분투하는 아름다운 인간들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고자 했던 것이다. 영화평은 아니다.

 

이 영화의 인물 중 북한군 장교로 나오는 손현주를 보다 보면 '쉬리'의 최민식이 오버랩된다. 손현주의 얼굴에 새겨진 강렬한 흉터를 보면서 도대체 어디에 긁히면 저렇게 어마어마한 흉터가 생길까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쉬리'의 최민식도 '은, 위'의 손현주도 결코 악역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모든 인간의 욕망을 거세하고 철저하게 대의명분을 위해 행동하는 그들은 사실 주연배우를 위협할 만큼 인상적인 조연이다. 두 인물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단 한순간도 지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인간들 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린 사이비 종교에 빠진 맹신도와 그들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난 구분되지 않는다. 세뇌되어 길러졌다는 이유로 그들의 맹목적인 태도가 용서되진 않는다.

 

아무튼 지질하든 은밀하든 그들의 위장은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은폐한 포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당화될 뻔했다. 다만 위대한 과업의 실체가 훨씬 은밀하고 지질하였기 때문에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을 뿐이다. 실컷 바보 행세를 해서 확실하게 신분을 위장하였는데,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폐기 처분되어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는 설정은 그들이 믿었던 위대한 과업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 일이었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의 시대 상황에 고군분투했던 불행한 인간의 이야기로 남을 수는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역사에 동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요즘의 내 삶은 단조롭다. 물론 대부분의 직장인의 삶이 단조롭다. 그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오만가지 예측불허의 상황과 부딪히기 때문에 단조로움을 잠시 잊을 뿐이다. 전체적인 패턴은 똑같은데 그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돌발 변수가 삶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변수들을 줄여 나가기로 결심했었다. 아니 그 변수가 가장 적은 직장을 찾고 또 찾았다. 그 결과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단조로움을 잊게 해주는 돌발 상황이 현저하게 줄었고 그 덕분으로 뜻밖에 찾아온 평온함이 오히려 일상의 단조로움을 환기시켜 준 것이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세상은 의도하는 대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 의도가 간과한 부분은 내가 버린 과거에 남기도 한다. 그렇게 돌고 돈다.

 

대중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홉 살 둘째 녀석이 지난해 가장 뜨겁게 좋아한 노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메이크곡 '한잔의 추억'이었다.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마셔버리자'라는 적나라한 가사를 읊는 우리 아들은 차에만 타면 이 곡을 무한반복으로 들려 달라고 우겨 댔다. 차라리 슈퍼주니어의 '미스터 심플'을 수십 번씩 듣던 시절이 그리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적응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우려는 있었지만 이 아이가 이 정도로 학교생활이 견디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심을 품게 했던 일이다. 특히 '마셔 버리자~'라는 소절에서는 취기 어린 울부짖음이 스며있었다. 아이의 음악적 기호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다만, 가사와 멜로디에 한참 직장생활에 찌들어 있던 과거의 내 삶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아 은근한 걱정이 앞선 것이다.

 

그런 우리 아들이 몇 주 전부터 좋아하는 노래가 바뀌었다. 커피소년의 '엔틱 한 게 좋아'에 빠졌다. 발음이 후져서 '해틱한게 좋아'로 들리긴 하지만, 아이의 이런 변화가 긴 겨울방학의 동면에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말이다. 이 노래가 좋다고 하면서 아들이 한 말은... '아빠, 이제 나 부드러운 음악이 좋아졌어'였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셔버리자'를 외치던 모습보다는 한결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아내와 난 밤마다 걱정을 한다.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꼬~ 하면서...

 

현실의 고단함과 피로를 견디는 힘은 다양한 곳에서 나올 수 있다. '은, 위'의 인물들은 '위대한 과업'과 '가족의 안위'에 기대었고, 혹자는 성공, 혹자는 재물, 혹자는 명예, 혹자는 자녀, 혹자는 안락한 노후에서 찾을 것이다. 아주 드물게는 세계평화나 인간 구원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무엇이 있어야 우린 버거운 현실을 견디어 낸다. 나는 가족의 평안과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에서 주로 힘을 얻고, 아주 쪼금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웃과 생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조금쯤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 아니 내가 망가뜨리지 않을 방법을 찾아본다.

 

우린 위대하고 숭고한 가치를 지향할 만큼 거창한 사명을 짊어지고 태어나진 않았다. 다만 일개미와 같이 몸속의 세포와 같이 꿀벌과 같이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는 있다. 개인의 생계와 사회적 균형을 위해서 말이다. 잉여라는 말이 부쩍 자주 등장하고 있다. 생명에게 잉여란 없다. 수만 마리의 알을 낳는 물고기에게도 차고 넘치는 것이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 그 욕망의 생산물들이 세상을 더럽히는 잉여이자 욕망의 씨앗이다. 덤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리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단조롭지만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린 하나의 완결적인 독립체이면서 엄청나게 불완전한 세상을 채워가야 하는 구성원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단조롭게 그러나 성실하게.

 

*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은 있다. 그런데 그 직업을 갖는 사람에게는 귀천이 없기 때문에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면, 귀한 일과 천한 일은 있다. 그러니 귀한 일을 하는 사람과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은 없다. 수긍은 가지만 위험한 말이다. 그냥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는 게 낫겠다. 그래야 사람이 겸손해진다. 세상엔 잉여도 없고 귀천도 없다. 잘 나가는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쟤는 전생에 짐승이었을 거야... 불쌍하게 전생을 살았으니 부귀영화가 온 거지.. 네 삶이 지질하다고 느껴져? 그럼 넌 전생에 사람이었던 거야... 그리고 후생에도 짐승이 되진 않을 거야... 쟤는 소나 말이 될 거야...' 아전인수도 가끔 삶을 견디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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