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130일(2022.09.17)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산공원을 지척에 두고도 가족과 함께 산책 삼아 찾는 일이 자주 없었다. 이 꼭대기에 둥지를 튼 게 벌써 9년이나 되었는데, 기껏해야 한해에 서너 번 정도 다녔던 것 같다. 최근에 제법 날씨가 선선해지기도 했고 특히 반려견 산책을 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보니 주말에 한번 가리라 작정을 하고 아이들에게도 미리 일러두었다.
낙산공원 옆으로 난 성곽길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이화동 벽화마을이 나온다. 건너편 삼선동 장수마을과 더불어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곳은 부산의 감촌 마을이나 통영의 동피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좁고 가파른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아기자기한 구옥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다. 흡사 영화 세트장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대부분 사람이 산다.
카페나 식당으로 개조하여 관광객들을 맞는 곳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런 가게들 틈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이 많다. 사진 찍으러 이곳을 찾는 이들은 항상 이런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누군가의 사생활이 침해당하기도 하니 말이다. 아침 출근길에 그 골목을 지나가 보면 삼삼오오 주민들이 골목에 나와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두부와 야채를 실은 트럭에서 아침 식사 거리를 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어릴 적 동네 풍경을 보는 듯 정겹다. 그분들의 옷차림새는 내가 그와 같은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울 강북의 핫플레이스인 그곳을 주말에 동네 마실 다녀오듯 찾았다.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니 마실이 맞다. 전부터 눈여겨보아 둔 전망 좋은 카페에 마침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다고 하여 호두(우리 집 강아지)까지 데리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어스름한 일몰의 하늘을 보고 난 후, 서울의 환상적인 야경을 보며 맥주를 한잔 하겠노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 카페에서는 간단한 스낵류와 수제 맥주를 팔고 있었다.
언제나 야심 찬 계획은 허점 투성이인 경우가 많다. 나는 선선한 가을밤의 정취에 일찌감치 홀려버려 많은 변수들을 놓치고 말았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낙산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첫 번째 사건이 벌어졌다. 자주 산책을 못하는 바람에 밖에만 나오면 오두방정을 떨어대는 호두가 유난히 흥분하는가 싶더니 돌연 이 녀석 행동이 이상해졌다. 갑자기 신체활동이 왕성해지면서 난데없이 배변감이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이 소심한 녀석이 실외 배변을 못한다는 사실...
이 녀석은 가끔 실외에서 소변을 보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즐거운 산책길에서도 절대 큰 용변을 보지 않았다. 한 번은 남의 집 개가 남겨놓은 변에 달려드는 바람에 졸지에 범인으로 몰려 찝찝함을 간신히 참으며 남의 집 개똥을 치운 적도 있었다.(OMG!!!) 밖에 나왔는데 배변감이 급하게 찾아올 때 호두는 우리를 붙잡고 집에 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이 날도 그랬다. 급기야 녀석의 항문으로 정체불명(?)의 검은색 물체가 잠시 자신의 존재를 보였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지만 나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 참에 처음으로 실외 배변에 성공하는가 하고 잔뜩 기대를 품기도 했다. 배변봉투와 물티슈, 배변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이 소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은 용변이 급한 사람이 그렇듯 양쪽 다리를 꼬고는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배변을 하려는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느릿느릿 녀석을 따라다녔지만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릴 적에 밖에서는 절대 화장실에 못 가는 딸아이와 같이 이 녀석도 엄청나게 깔끔을 떨어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호두와 씨름하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게 두 번째 사건이다. 밤공기가 찰까 봐 바람막이 점퍼까지 챙겼건만 9월 중순의 서울 밤은 한여름 같이 덥게 느껴졌다. 잠시 시원했던 날씨는 태풍 탓이었던 걸까? 이때부터 나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배변을 포기하고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에 자리는 여유가 있었지만 예상대로 모든 창은 열려있었고 에어컨은 꺼진 상태였다. 순간 나의 땀은 갈 곳을 잃고 목덜미를 따라 기분 나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카페는 전망 좋은 테라스가 가장 인기 많은 자리다. 다행히 자리는 비어있었지만 내 몸은 땀에 젖었고 날씨는 여전히 후텁지근했으며 어둑해진 동네에서 유난히 빛이 밝았던 카페는 모기들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게 세 번째 사건이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냅킨으로 급한 대로 땀을 닦고 나니 역시나 가을이라 덥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 주위로 몰려드는 모기떼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나의 여유롭고 한가로운 가을밤의 정취는 한여름밤의 꿈이 되었다.
기대했던 맥주는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았고 아이는 긴 바지를 입고 왔는데도 모기 물린다고 투덜거렸다. 호두는 잠시 배변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으나 이내 배를 깔고 편안히 누웠다. 이 녀석은 이날 밤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집에서 변을 보지 않고 저녁이 되어서야 빅 똥을 선보였다. 나는 당초의 계획대로 가을밤을 즐기진 못했으나 꿋꿋이 맥주 두병을 비우고 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어스름하게 노을 진 서울의 하늘을 감상하였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산성곽을 끼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잠시 맛보았다.
맥주와 음료를 반납하러 카운터에 갔을 때 젊은 친구가 다가와 모기 쫓는 스프레이를 받아갔다. 이런... 나는 서울의 달동네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