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217일(2022.12.13)
학교가 멀리 있는 둘째를 아침마다 데려다주는데, 아무리 일찍 나와도 항상 막히는 구간이 있다. 우리 집에서 동대문으로 빠져나오는 길과 4호선 이수역 교차로부터 사당역 사이가 그랬다. 매번 이 두 구간에서 병목이 걸리는 바람에 등교시간은 40분 내외에서 훌쩍 한 시간을 넘기기도 했다.
들쭉날쭉한 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고심 끝에 우회로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하지만 인적이 드문 이 길을 택한 덕분에 월요일에도 40분 정도면 학교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골목길을 다니는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길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간혹 길가에 나와 걷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조심스럽게 비켜가곤 했다. 왠지 그분들의 공간에 내가 몰래 들어간 것처럼 불편하고 계면쩍었다. 그 시간에 나와 계신 분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하신 노인분들이다. 좁은 길을 달리는 차에 놀라거나 당황하실까 봐 경적 한번 울리지 않고 조심조심 지나가 보지만 언제나 그분들의 옆을 지나갈 때면 놀란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나 요즘은 해가 짧아져 아침 7시에 나와도 바깥은 캄캄한 새벽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을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워졌지만 계속 이 길을 다녀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지는 중이다.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내 고민은 고민에서 멈추고 말 것 같지만 말이다.
요즘 며칠 동안 거의 매일 만나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신다. 아이의 학교가 가까워지는 사당동 어느 골목길에서 마주치게 된 이 할머니는 붉은색 계열의 누빔 옷을 입으시고 두 팔을 잔뜩 뒤로 펴신 채로 걸어가신다. 허리가 조금 굽으셨는데 양쪽 팔을 뒤로 뻗은 채로 좁은 골목을 갈지자로 뒤뚱뒤뚱 걷는다.
이 분의 존재를 처음 인지했을 때는 그날따라 아이의 등교시간이 간당간당했던 때였다. 좁은 골목이지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시간이 촉박할 때는 조금 속도를 내는 곳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좌우로 휘청거리면서 걸어가시니 나는 속도를 내기는커녕 아예 달리지 못하고 서서 기다려야 했다. 조급한 마음에 저분은 왜 저렇게 괴이한 걸음으로 걷는 걸까 슬쩍 짜증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그 시간이면 그 골목에서 그 할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할머니의 걷는 뒷모습을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관찰하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팔이 불편하신 분이 아니었다. 내 추측으로는 굽은 허리를 펴기 위해 몸을 일으키시면 균형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양팔을 뒤로 뻗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셔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곧은 방향으로 걷기가 어려우신 것이다.
그 할머니를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저렇게 몸이 불편하신 분이 이른 아침부터 어딜 저렇게 바삐 가실까 궁금해졌다. 편하게 누워 지내실 수 없는 형편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일주일 넘게 그 할머니를 뵈면서 오늘에서야 나는 다른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딱히 걷는 것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번듯한 보행 보조기라도 있었다면 한결 수월하게 걸으셨겠지만 할머니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보조기 같은 걸 달고 다니는 게 성가셨을 수도 있다. 그분은 온전히 당신의 힘으로 걷고 계셨다.
그분을 측은한 시선으로 혹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건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뿐이었다.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걷는 그분을 문득 바라보았고 거기서 시선이 고정되었으며 그리고는 오만가지 상상으로 그분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신다.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내 살아온 길이 그분의 걸음걸이보다 나을 것이 있을까? 지금의 내 모습도 누군가에겐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낸다. 내 삶의 궤적이, 내 인생의 행로가, 내 지금의 위치가 누군가에게 측은하거나 망측해 보일 거라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부끄러운 삶의 이력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남의 걸음걸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나는 무언가? 이런 복잡한 생각에까지 이른 것은 요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내 아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울증 치료제 양을 늘리면서 어지럼증이 생긴 아들의 부탁으로 며칠 전 지팡이를 사주었다. 등산용 지팡이보다는 노인들이 쓰시는 지팡이가 더 좋다는 아이의 선택을 걱정하면서도 마지못해 사준 지팡이를 아이는 잘도 쓰고 다녔다.
그런데 점점 주변의 시선이 불편하다던 아이에게 엊그제 어떤 할아버지께서 말을 걸어오셨단다. 다리가 불편하냐고 물으시더란다. 아이가 어지러움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할아버지께서는 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단다.
지팡이가 필요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된다. 남이 든 지팡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혀를 끌끌 차는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건강한가? 그리고 얼마나 인간적인가? 제발 그 불편한 시선을 거두라. 내 아이는 어지러움만 감당하기에도 힘이 든다.
그 아들이 어제부터는 손목 인대가 좋지 않아 한쪽 팔에 반깁스를 했다. 그런데 아들의 말이 걸작이다. 지팡이 들었을 때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편해졌단다. 팔에 깁스를 한 고등학생은 정상으로 보이나 보다. 편견과 오지랖은 개나 줘버리자.
* Image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