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eful 하지 않으면 누구도 care 할 수 없다.
내 아내가 여느 여인네들과 다르게 무던한 사람인 것은 연애할 적부터 알고 있었다. 예민하다 못해 까칠하거나 감정기복이 심해 기분을 맞추기 힘든 여자들보다는 백번 낫다고 생각했다. 그 무던함이 태생적으로 둔감한 탓인 것을 놓친 건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어머니는 예민하다 못해 피곤한 분이었고 강박적인 성격으로 온 가족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셨다.
집안은 언제나 어머니의 격앙된 목소리로 가득했고 형제가 많았던 탓에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은 누군가 어머니와 충돌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거부감으로 점철되었고, 나는 절대 하이톤의 쨍쨍거리는(?) 여자와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어머니는 지금도 골절수술에 이은 합병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지만 타고난 성격을 숨길 수 없어 매일매일 간병인을 괴롭히신다. 작년에 장염으로 한 달 넘게 입원했을 때는 더하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간병인에게 용돈이라도 얹어드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 내 아내의 조용한 성품이 좋았다. 좀체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을 닦달하지 않으며 웬만해서는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던한 성격이 나는 좋았다. 밤늦게 술에 취해 연락두절되지 않는 한 아내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아내의 성격이 문제가 된 것은 아이들을 키우면서부터였다. 아내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아이들을 세심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다루는 데에는 너무나 서툴렀다.
사춘기 딸아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학교폭력에 노출된 아들을 살피지 못했다. 아내는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에 서툴렀다. 누군가의 감정을 공유하고 기분을 맞추는 법을 몰랐고 그런 상대가 골이 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툴툴거리는 아이들에게 외려 타박을 하여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일이 잦았다. 아이들과 아내의 다툼은 대부분 내가 개입해야 끝이 났다. 나는 그 개입이 매번 괴로웠다.
딸아이가 무용으로 예고입시를 준비할 때에도 학교에 메인 아내 대신에 내가 뛰어다녀야 했고 아이가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언제나 해결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마다 부장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만나곤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언제나 만사를 제쳐두고 나서야 했고 아이들도 언제부턴가 말썽이 생기면 나를 찾았다.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이유는 각자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이 무 자르듯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으며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 같은 경우에는 서로 역할분담을 해서 그때그때 보완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두 아이를 챙기기 어렵다. 그 일이 매번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이루어진다는 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20여 년이 흐르고 나면 어느 정도 호흡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그런 면에서는 신혼부부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이 우울증 투병을 시작한 이후 여러 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힘겨워하다가 심각한 인지능력 저하가 찾아왔고(물론 그전부터 인지능력이 뛰어나진 못했지만), 급기야 병원신세를 지기 시작한 지도 6개월이 넘었다. 나는 내 아내가 사려 깊고 세심하며 모성 가득한 엄마로 거듭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감에 허덕이는 내게 백지장이라도 맞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는 그런 자신을 자책하기도 할 것이다. 그녀도 나름대로 엄마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안다. 그런 아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아내는 careful 하지 못했다. 그건 타고난 것이었다. careful 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누구를 care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건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솔로몬의 반지와 육자진언 반지를 끼고 손목엔 삼재부 염주를 차고 날마다 주문을 외우고 있다. 간절한 마음이 어디에든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