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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l 19. 2021

볶이고는 못살아

직업이라는 운명(2013. 4. 14)

살다 보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무료함보다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불쑥 겪게 되는 감정적 소비가 더 견디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혹은 관계라고 입을 모아 떠드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생활인들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자유로울 수 없는 밥벌이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지만, 정작 노동의 고단함을 버티고, 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절박한 편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극한 직업이나 3D업종으로 분류되는, 위험천만하고 건강에 치명적인 특수한 직업군을 제외하고 말이다.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된 지 벌써 13년이 되어가면서 한 번도 현직에 대해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주변의 동료 혹은 지인들에게는 '선망'까지는 못되어도 종종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나의 일이, 왜 나에게는 매번 심각하게 이직의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보기도 했고 해답이 없는 과제에 몸과 마음을 상해 보기도 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즐겁고 기껍게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사람들도 많을 터인데 어째서 나는 기껏 적응한 직장을, 아까워 보이기까지 한 기득권(?)을 미련 없이 던질 용기를 내었던 것일까?

 

스스로는 그것을 '성장'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보기도 하였고, 결과적으로 항상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적당히 객관적인(?) 입증을 수반하였기에 끊임없이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오긴 하였지만, 역마살을 들먹여도 될 만큼 난 숨 가쁘게 자의 반 타의 반 새로운 환경과 낯선 업무에 몸을 던지며 살아왔다. 특히나 '도전'을 즐기는 타입과는 핏줄부터가 다른 내 성격을 아는 이들에게는 늘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분위기에 잔뜩 피곤해했을 만큼 지독하게 낯을 가리던 소심한 아이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끊임없이 출구전략을 마련하고 부단히 애를 태워 3년 주기로 직장을 옮겼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도피'였다. 나에게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은 견딜 수 없는 삶을 극복하는 일탈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운동으로, 음악으로, 레저활동으로, 또는 특수한 취미생활 등으로 안타깝게는 음주가무로 고단하고 재미없는 일상의 피로감을 견디어 내지만, 대신에 나는 이직을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이직에 준하는 다섯 번째 출구를 넘었다. 적극적인 자기 의지로 또 하나의 관문을 넘어섰으니 말이다. 남녀 기숙사에 비교될 만큼 이질적인 불가침의 영역을.

 

현대인의 바쁘지만 재미없고 고달픈 일상은 영화나 소설의 단골 주제라고 할 만큼 식상하고 뻔한 이야기다. 그래서 파격적인 일탈의 소재라고 해 봐야 로맨틱하게 포장한 불륜 내지는 춤바람, 모험, 여행 혹은 전혀 새로운 삶의 도전 나아가 범죄, 죽음 등등 이제 어지간해서는 새로울 것도 없다. 나는 이직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짜릿함과 두근거림을 느낀다. 다만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일탈행위가 바람직하거나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나에게도 다양한 취미와 유희가 있다. 나는 별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무료한 여가시간을 충분히 채울 만큼 드넓은 관심분야를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악도, 영화도, 미술도, 책도 나의 일탈이 되어주진 못했다. 일탈은 휴식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그것은 충분한 수면과 주기적인 운동으로 다진 체력, 그리고 따뜻한 가족관계만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한 수면, 운동, 사랑하는 가족은 일을 할 수 있는 기초체력과 동기부여의 필수조건이긴 하다. 이중 나는 운동부족을 제외하고는 100점에 가깝다. 한 때는 나의 심각한 저질체력이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체질적으로 운동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과중한 일과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문제가 육체적인 피로도를 가중시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 내가 일에서 쉽게 지치고 힘들어하는지, 그래서 일과 후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본 결론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며칠 전 친한 직장동료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런 고민을 털어놨을 때 그 친구의 답이 명쾌했다.


'볶이니까'


볶인다는 말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를 촉발한다. 그것은 피곤하고 힘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매일매일 엄청난 행군을 하거나 가혹한 '얼차려'에 시달리는 군인들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예측가능성'이다. 오늘 30킬로미터 행군을 했고 내일도 할 것이고 그렇게 훈련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상 대부분은 육체적 고통을 받아들인다. 강훈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볶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체력이 쌓이지도 않는다. 날마다 듣는 잔소리에 이골이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극단적으로 아이가 엄마를 찌르기도 한다. '볶이는 것'은 마음속에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직장에서 내게 잔소리를 하는 이는 없다. 내가 볶이는 것은 수시로 발생하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과 그것을 대응하기 위한 긴박함과 그 긴박함을 해결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만나야 하는 낯선 인간관계와, 그리고 그 인간관계에서 따라오는 불필요한 감정적 소비가 나를 '볶는다'.

 

일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다뤄야 하는 일에서 나는 치명적일 정도로 '감정'을 소비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를 움직이기 위해 어떤 조치를 하고 그의 반응을 보면서 또 다른 대응을 고민하는 일은 생산직 근로자나 특수 전문직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장인에게는 일상이다. 그 일상을 나는 견디지 못한다. 열세해 동안 해 온 그 일상이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지독한 이물감이다.

 

'볶인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상태일 뿐이다. 내가 '볶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나는 살아내기 위해서 도피한다. '삶'이 누구에게는 그저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내야'하는 것이다. 그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지만 정말 불행한 이는 '평양감사'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모두가 하고 싶은 '평안감사'가 누군가에게는 악몽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쓰고 6개월이 되지 않아 나는 확실히 이때보다 덜 볶이는 직장으로 이직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정확하게 7년 7개월만에 자발적 휴직을 감행하였다. 세상에 볶이지 않는 직장은 없다. 그저 그 정도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성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노동자는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소모를 모두 노동의 한 형태라고 애써 정의내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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