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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람 Feb 20. 2024

품위를 지키는 선택 - 「클로버」


우리는 왜 아동청소년에게 문학을 읽으라고 할까? 간접경험을 통해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없는 것, 나와 다른 삶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실제로 청소년심사단은 이 작품을 읽고 “주인공을 통해 느껴 보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라는 심사평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클로버」가 내게도 기꺼운 이유 중 하나다.



중학생 정인이는 수제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폐지 줍는 할머니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보낸다. 작중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야말로 바늘 끝. 바늘 끝에서 탭댄스를 추듯 사는 일상은 악마가 등장하며 일상 바깥으로 빠져버린다. 악마의 유혹에 상상을 맡길 것인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 것인가? 원치 않은 선택 앞에서 견고하게 유지되던 정인의 마음은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회복되는지...그 과정을 활자 너머에서 따라가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그만큼 즐겁게 읽었다.


21세기 현대 한국 청소년을 위한 파우스트. 읽으며 생각한 바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인간의 품위


가난하지만 우아하고, 품위를 지키는 삶을 다루는 작품은 꾸준히 있어왔다. 어떤 조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켜야 하는 선을 지키며 살 것. 정인이는 가난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정직한 에이브'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무리 태주가 정인을 괴롭히더라도 그 의기만큼은 해칠 수 없었을 거다. 품위는 세우는 것도, 해치는 것도 온전히 주인의 몫이다.


품위를 위선이라 치부하며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풍조가 전에 비해 만연한 시대다. 돈이나 계급(이 둘은 사실상 동의어라고 봐도 되겠다.)이 보장만 된다면 옳지 않은 일도 어떻게든 가치로운 일이 된다. 착하게 사는 것은 속된 말로 '호구'의 행동으로 평가받고, 규칙을 지키면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비웃음을 산다. 가난은 빈자로 하여금 호구처럼 살지 말라고,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비웃는 이들은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할까? 정인이가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한 수제버거집 창문을 깬 것을 '사이다'로 고평가할까? 나중에 수제버거집 주인에게 창문을 깨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를 변상하러 가겠노라 다짐하는 모습을 보고 '고구마'라고 답답해할까? 



내가 뭐라고 독자의 감상을 제한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최소한 그렇게 읽히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갸륵한 시선으로 정인이를 바라보는 사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품위를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낡은 운동화, 겨울 코트 하나로 타인의 가난을 재단하고 삶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어떤 삶이 스스로를 인간답게 만드는지 자문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삶이 어딘가에 있다고 (제발)간접적으로라도 알기를 바란다.


「클로버」가 반가운 까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근래 출간되는 작품들을 읽으며 중산층으로 살며 가난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다루는 가난은 유리바닥은커녕 바닥조차 가지 않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로 지내며 복사기, 물티슈, 커피 필터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불가촉천민이 된다는 게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시각에 갇힌다면 정인이가 복지관에서 받은 쌀과 라면이 왜 빌어먹을 것인지 어렴풋하게도 짐작해낼 수 없을 거라고 감히 짐작한다.


인간의 품위는 고급 겨울 코트 한 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수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워지는 거다. 


그렇다면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되어야 하는가?



사회가 가야 할 길


첫 담임을 6학년으로 시작했다. 수학여행을 추진하려면 수학여행을 갈지 말지 동의 여부부터 학부모에게 물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를 가기로 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한때는 정말 부자들이 살던 동네였으나 지금은 그저 다세대, 다가구, 빌라가 많으며 인근 대학가 학생들을 노리는 원룸이 한창 들어오는 동네에 위치했다. 어떤 학생의 집은 그럭저럭 넉넉했다. 어떤 학생의 집은 겨울옷 앞주머니가 다 떨어져 솜이 흘러나와도 새 옷 하나 해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모든 가정에서 수학여행 비용을 대주는 것이 쉽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학교에서는 사회복지 대상자라는 것을 선정하고, 그중 수학여행 비용을 내기 가장 어려우리라 짐작되는 학생을 학급마다 한 명씩 선정해 그 비용을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 학교가 유별난 게 아니라, 내가 근무하는 지역 교육청의 학교들은 모두 이런 절차를 밟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교육청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학교란 조직은 단위 학교마다, 학년마다, 학급마다 세세한 규칙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지금은 또 어떤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런 지원을 받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꿈을 마음껏 펼쳐라'라는 말은 허상이다. 가뜩이나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고르고 골라 고른 것이 자신을 안 좋은 상황에 떨어뜨릴지, 그렇다면 얼마나 안 좋게 만들 것인지 가늠하는 일조차 어렵다. 이를 온전히 이 아이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게 건강한 사회인가?


개개인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네 탓, 공부할 시간에 일하느라 성적을 올리지 않은 네 탓, 엄마가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끌고 일하다가 죽은 탓, 노력을, 노오오오오력을 하지 않은 네 탓이라고. 하지만 사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현대 복지국가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성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좀 더 안전(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전까지)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클로버」의 세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어른들은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복지는 인간의 품위를 지켜주는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언더 도그마를 거론하며 그들이 선하지 않은데 어떻게 나라가 그들의 삶을 보장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복지는 선한 자를 위해 실천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 안전망이라고 답하겠다.




학급문고 책장에 도서관에서 지원하는 책과 내가 지금까지 차곡차곡 모은 아동청소년 도서가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클로버에도 내 이름 스티커가 붙어 학급문고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거다. 담임이 가져왔다는 이유만으로도 학생들은 다른 책보다 조금 더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 책이 학생들로 하여금 치열하게 고민하며 읽는 책이 되면 좋겠다. 정인이의 곁에서 정인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지켜보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어제보다 조금 더 뚜렷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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