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멋진 판단 근거를 준다. 예전에 이렇게 해보니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는데 이만저만했다더라, 기타등등, 기타등등...경험은 쌓이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삶을 위한 최소한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아마 나이를 먹은 사람이 현명하다는 건 이 데이터베이스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장미칼도 맥가이버칼도 만능이 아니듯 경험도 만능은 아니다.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퇴색되어버린 과거의 경험, 한쪽에 치우친 경험, 필터 버블 속에서만 쌓은 허구의 경험...뭐 그런 것들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에 딱 좋더라. 이번에 얘기하고 싶은 거는 과거의 경험이다.
사람은 잘 안다는 착각에 너무 쉽게 빠져버린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지나가는 경험'은 절망의 골짜기와 무지 사이의 저 정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기억, 치기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화를 낸 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혼나 자나 단소 따위로 맞은 적 등등...이런 기억을 얼마나 상세하게 기억하는가? 정말 충격적인 기억이나 글로 소상히 적어둔 일이 아닌 이상 아동기 기억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왜 우스갯소리로도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나는데 옛날 일은 어떻게 기억하냐'라고 하지 않나? 당장 나만 해도 내가 언제 넘어저서 코가 깨졌는지, 동생이 이마를 할퀴어서 난 상처가 어쩌다 생긴 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대충 알고 있는 어린이의 행동양식'에 따라 '아~마도 이러다가 생긴 거겠지?'라고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추측을 곱씹거나 입에 올리면 추측은 점차 사실이 되고 만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도 없는데...
성인은 아이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모든 어른은 아이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인이 된 다음 아이들의 행동을 보며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우리 때는~' 같은 말을 어렵지 않게 한다. 하지만 어른들, 자신의 아이 시절을 그렇게 잘 기억하나...? 정말로?
나는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기분을 느꼈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유소년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내 개인사를 대충 정리해둔 일종의 캐릭터창에 주변 어른들의 증언과 명백한 사실을 기록해뒀기 때문이다. 정성적인 내용은 '그랬겠거니' 하는 추측으로만 채운다.
'그랬겠거니'에 들어갈 내용들은 사실상 내가, 혹은 우리가 어린이를 생각할 때 같이 떠올리는 감상들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었던 경험이 있어서 어린이라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쓰잘데기 없는 주저리가 너무 길었다.
2020년 올해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 우리는 어린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어린이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책을 읽으며 평소 내 태도에 대해 정말 많이 점검하게 되었다. 아직도 '무식한 정점'에서 다 내려오지 못한 거 같다. 내가 어린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린이를 만나왔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이제사 의식적으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지...
어린이에게도 지키고 싶은 품위와 체면이 있다. 정작 아이들에게 말하면 '에이 그런 거 없어요', 라고 하지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아니다. 공개적으로 혼나면 몹시 수치스러워하고 이에 대해 성인이 사과하면 쿨한 척 괜찮다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막상 사과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말이다. 지금와 생각하면 그랬다. 어떤 성인들은 너무 쉽게 어떤 성격의 어린이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봐야 한다고 한다. '경험적으로'(그러니까 일반화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말이다)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망신당했을 때의 기분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책을 읽은 지금, 남의 품위를 지키며 부족한 부분을 말할 수는 없는 걸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인이 어린이에게 망신을 주는 건 손쉽다.
어느 대목을 읽으면서 되게 우울했었는데...정확한 대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둘 걸 그랬다.
당시 감정은 기억난다. '나는 이런 사람은 될 수 없겠구나'. 절망한 건 아니다. 그보다는 한계를 느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아, 아마 '사랑이라고 해도 될까' 챕터를 읽을 때였던 거 같다. 나는 평생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볼 수는 있겠지만 사랑...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성인을 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공적 영역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는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까?(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내 동료들은 나를 다소...놀리듯이 보거나 유치하게 여길 것이다. 확신한다. 학생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이 집단은 너무나도 냉소적으로 변했다.)
어느 강의에서 다른 사람을 연민으로 대할 때 서로가 서로를 훨씬 좋은 상대로 대우할 수 있을 거라는 요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랑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연민으로 대하는 건 할 수 있을 거 같다. 동물들도 행동에 이유가 있는데 어린이라고 말과 행동에 이유가 없을까? 아닐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하며 어떨 때는 번잡스럽게 느껴지는 행동에는 이유(아이들은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나름 근원을 짚어가면 이론을 세울 수 있는 정도의 것 말이다...)가 있을 거다. 타인의 연민을 경험한다고 그 아이들이 모두 당장 행동이 개선되고 성인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를 수는 없을 거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을 거쳐왔다. 거쳐왔기 때문에 기꺼이 연민을 베풀 수 있는 거다.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랬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랬을 거야.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으니까.
우리는 어린이를 정말 잘 알고 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 한 켠에 문장으로만 남은 기억을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현상으로 믿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면 근거 없는 자신감 구간을 넘어 정말로 잘 아는 길에 오를 수 있을 거다. 나도 그랬다는 동질감을 조금만 꺼내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수용할 수 있을 지 모른다...그랬으면 좋겠다. 다음주는 어제보다 아주 조금만 더 우리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되자...'어린이라는 세계'가 내게 준 삶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