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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람 Feb 24. 2024

외견이 내면을 반영할 수 있다면 - 「진화 신화」


원래는 2010년에 행복한책읽기에서 발간된 「진화 신화」에 수록된 단편소설이랬다. 도서관에 가서 빌리고, 다른 작품을 볼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도서관에 갈 여력을 재는 시점에서 좀 부끄러워해야 하나... 걸어서 10~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데도 당장의 피로를 달래겠다는 이유로 외출을 삼가고 퇴근길 여백을 늘이지 않는 게 지성인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만약 「진화 신화」속 세계관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었다면 분명 나는 짤뚱한 다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가진 모습으로 진화했을 거다. 불만은 많으나 불만만 가질 뿐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모습 말이다.




「진화 신화」에서 외견은 사실상 내면이었다. 일종의 사상의 표출이다.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체화한 거다. 특히 주인공과 그 숙부의 진화 형태를 보면 실로 그러하다...세상을 피해 어둠에 파묻혀 파충류(묘사에 따르면 사실상 용인 거 같다)가 된 주인공과 권력에 취해 돼지가 되어버린 차대왕의 모습이 참 상징적이다.




내면이 외견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살까?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타성은 금방 고개를 들이민다. 사회는 복잡해졌고 '멋진 신세계'는 문을 연 지 오래다. 각종 미디어에서 인간이 아닌, 특정 형질을 가지도록 진화한 인간을 찬미한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는 어려울 거다.


무서운 일이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 애써 외면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인간의 조건」을 선물로 받았지만...아직 열 엄두가 안 난다. 입문서를 좀 읽고 열어볼 걸 그랬나? 아직 머리에 체계라는 것도 제대로 안 잡힌 내게 너무 어려운 과제를 부여한 건 아닐까...어쩌겠는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미 열어버렸다. 사실 사람 이름을 외우고 챙기기가 아직 어렵다. 나는 공부 오래 하기는 글러먹은 거 같다...내용 파악이 어렵다...그나마 대중적이랬는데... ...아니다, 그냥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그렇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쓴 글에서도 연민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이라면 연민과 함께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필요한 건 참 많지만 연민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식이 없다면 시민으로 산다고 보기는 어려운 거 같다. 연민이 있어도 연대하지 않는다면 함께 전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연대하나 연민이 없다면 그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워질 거다. 사실 연민이 없으면 연대는 어렵다고 본다. 그것은 연대라기보다는...오월동주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상대를 도구로 취급한다든지.


잠깐 옆 길로 새 버렸다. 원래 강의 중에도 딴소리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사실 우리는 「진화 신화」에서 묘사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문학적 허용을 적용하자면, 모두 마음먹은 대로 진화하고 있다. 관상은 '싸이언스'가 아니지만 인상은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름이 삶의 지도고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비슷한 성정을 지닌 이들을 모아두면 어찌 그리 서로 비슷하게 생겼는가? 얼굴을 빼다 박았다는 말이 아니다. 인상이 말이다. 그 이목구비의 오밀조밀한 조합이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몇몇 유명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럴지 모르겠다. 예시를 들고 싶은데 부적절한 예시밖에 떠오르지 않아 삼키게 된다...


결국 주인공도 자신이 생긴 대로 살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현대사회에는 다소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시대의 부름, 민중의 소망...주인공 본인은 이로부터 멀어지려고 그렇게 도망갔지만 결국 용이 되어 승천하고 비를 내렸다.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자신이 갈 길대로 진화하여 가버렸다. 나는 이 과정이 참 맘에 들었다. 그토록 스스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결국 사람은 갈 곳으로 가게 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우리는 그저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이론을 같은 맥락에 둘 수도 있겠다.





내면은 외견이 된다. 이를 무거운 말로 표현하자면 운명일 거다. 자아의 외부에서 내 운명을 그토록 붙들고 흔들어도 결국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우리는 생긴 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진화 신화」속 서사가 현실에 필요한 때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져도 운명은 우리를 부른다.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 살자. 인간으로 살기 힘든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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