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보다 가벼운 책임

무겁되, 가볍게

by 밤하

나는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후회를 품고 살았어.
그 후회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지만, 결국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어.

학창 시절까지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딸이자 학생이었어.
반항은 했어도 결국은 어른들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을 걸어왔지.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내신 점수를 잘 받아서, 좋은 학교를 골라가게 되면 내 앞엔 꽃길이 펼쳐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 공부만 신경 쓰며 살았어.

성적은 나쁘지 않았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무엇을 하든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나이가 들면 알아서 삶이 갖춰질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던 것 같아.

고3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갑자기 나에게 미술을 해보라고 권하셨어.
이미 늦은 출발이었고,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도 모른 채, 나는 준비된 사람들과의 경쟁에 뛰어들었어.

그 당시 나는 이과에 진학해 있었어. 이과 성적은 대부분 미술 입시에 반영되지 않다 보니 내 성적은 서울권 대학을 지원하기엔 애매해졌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실기 준비를 하면서도, 내신 역시 점수에 반영되는 과목은 모두 1등급으로 끌어올렸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방법은 몰랐고,
멈출 수 없어 달리고 있었어.

엄마는 내가 홍익대학교를 지원하길 원했어.
나는 우리 집 형편으로는 합격해도 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붙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며 나에게 홍대를 준비할 것을 강요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허무한 논리가 아닐 수 없지.
결국 나는 다른 대학에서는 요구되지 않았던 수능과 미술 활동 보고서라는 이름의 자소서까지 준비해야 했어.

매일 절망하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갖춰야 했기에 넘어질 수 없었어.

입시가 끝나갈 무렵, 미술학원 선생님은 내가 쓸 수 있는 수시 원서 여섯 곳 중 세 곳만 쓰라고 하셨어.
불안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수시 실기 보러 다니느라 정시 준비 못 해서 다 떨어지게 되더라도,
나 원망하지 마라.”

결국 나는 수시 세 곳, 내 실기 실력으로는 붙을 수 없는 대학만을 지원했고,
모두 떨어졌어.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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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아보면 나는 어른들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어.


만약 내가 스스로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내 강점이 내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신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대학을 지원했더라면.

미술 입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처음부터 준비했더라면.

가망 없는 목표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더라면.


나는 바꾸지 못할 선택들을 끝없이 되짚었어.
미술 선생님을 원망했고,
엄마를 원망했고,
어른들을 원망했어.

나는 후회와 원망 속에서 내 미래를 낭비하고 있었어.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
내 삶을 어른들에게 맡긴 것이, 나였다는 것을.
나는 선택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어른들이 선택하게 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며 원망하고 있었어.
나는 책임을 피하고 원망을 선택한 거야.

그때 이후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어.
반대가 있어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길을 선택했어.
그 과정에서 힘든 일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어.

결과가 어떻든, 내가 선택한 삶이기 때문이야.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벽한 답을 알고 사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대신 정해 준 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어.

책임을 지는 삶은 무거워.
하지만 원망을 안고 사는 삶보다는 훨씬 가벼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기로 했어.

무겁되,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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