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광화문역 화장실에서 원피스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혜진이였다. 블라우스를 벗고 있을 때나 스타킹을 말아서 가방에 넣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면 받지 못 할 뻔했다. 혜진이는 어디서 보고 있기라도 하듯 꼭 내가 받을 수 있을 때 전화를 했다. 첫째 아이가 잡고 일어서기 시작할 즈음부터 혜진이는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었다. 보통 밤 열 시 넘어 전화했다. 혜진이는 며칠간 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여보세요라고 하기도 전에 혜진이가 먼저 말했다. 너 혹시 광화문이야?
목요일 오후 2시 33분은 혜진이가 쉽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에 한숨 돌린다고들 하던데 혜진이를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부리나케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에 흩어진 장난감 조각을 줍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국이나 찌개 하나 겨우 끓여놓고 나면 잠깐 시간이 생겼다. (이 일정은 장보기를 새벽배송 받는 것으로 대신할 때 가능했고 마트까지 갔다 오면 하루가 더 빡빡했다) 혜진이는 그 잠깐의 시간을 오롯이 혼자 보내는 데 썼다. 그때는 나도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메시지보다는 일주일에 두어 번의 통화가 혜진이와 나의 일상적인 연락수단이었다. 전화해서 다짜고짜 광화문이냐고 묻는 통에 의아해서 혜진이가 밤 열 시가 아닌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끊고 나서야 깨달았다.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기에 광화문까지 십 분 만에 올 수 있다는 건지, 태린이 어린이집 3시 반에 끝나는 거 아니었나. 광화문역을 나오면서 혜진이를 만나면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한꺼번에 물어볼 참이었다. 그러고 나서 평소처럼 혜진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오늘은 오랜만에 내 이야기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면접 보면서 속에 쌓은 말을 혜진이 앞에 펼칠 준비를 했다.
혜진이를 만났지만 나는 준비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혜진이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진이는 택시를 타고 내가 서 있는 정류장에 내렸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웃고 있는 혜진이가 보였다. 9개월 된 둥근 배를 감싸 안고 택시에서 힘들게 내리면서도 누굴 따라 웃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없어서 웃는 것도 아니고 정말 웃고 싶어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듣다 만났다. 친구 한 지 10년이 넘어가니 왜 웃는지는 몰라도 정말 웃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혜진이와 나는 대학교에서 같은 과도 동아리도 아니었다. 우리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혜진이의 인사이더 기질 덕분이었다. 사실 인사이더라는 말은 요즘에 와서 더 많이 쓰고, 그때는 반대말 아웃사이더가 유행했다. 아웃사이더는 말 그대로 안-대학교에서 ‘안’이란 주로 과 행사나 모임을 말한다-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밖으로 맴도는 사람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수업을 듣거나 밥을 먹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나 같은 애들을 그렇게 불렀다. 나는 내가 아웃사이더, 줄여서 ‘아싸’인지도 몰랐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지 관심도 없는 사이에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혜진이와 말을 트고 나서야 알았다. 너 아싸야? 왜 혼자 있어?
반대로 인사이더는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뜻했다. 혜진이는 전형적인 ‘인싸’였다. 1학년 1학기 철학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 과에서 나만 이 수업을 신청했다는 것을.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던 내게 같이 조모임을 하자고 부른 사람이 혜진이었다. 혜진이는 나를 자기네 연극 동아리에 가입시키는 것은 실패했지만 다음 학기에도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는 점점 친해졌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서울에 살았던 것처럼 혜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울 옆에 S시에 살았다. 우리는 같은 호선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 내가 내리는 지하철역에서 열다섯 개 역을 더 가야 혜진이가 내리는 역이 나왔다. 처음 혜진이네 동네에 놀러 갔을 때 나는 정거장 수를 세어보고 이 정도면 기차를 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놀렸다. 혜진이가 지하철역에 내려서 또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하니 차라리 광화문에 가서 직행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다. 버스가 지하철보다 빠르다고 해서 나는 그럴 수가 있나 의심했다. 직행버스를 타보니 네다섯 번만 서고 대부분의 정류장을 통과해 S시까지 내달렸다. 혜진이 소개로 사귄 친구들까지 해서 다 같이 만나는 날에는 꼭 혜진이네 집이 가장 멀다는 말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놀러 가본 적 있는 내가 혜진이를 변호했다. 광화문에서 직행버스 타면 30분밖에 안 걸려. 평일 낮에 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막히지도 않을 때라는 전제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었다. 어차피 그 애들은 혜진이를 서울로 부르면 불렀지 혜진이를 위해 S시까지 놀러 가지도 않았을 터였다.
택시에서 내리는 혜진이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우리 둘이 같은 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기예보에서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봄 날씨라고 해서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그새 살이 쪘는지 답답했다. 면접 끝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원피스를 집어왔다. 혜진이가 입은 원피스는 임부복이었지만 면 재질에 무늬가 없는 단색이어서 내 것과 꽤 비슷해 보였다. 너 진짜로 CCTV로 나 보고 있냐고 장난으로 따져 물으니 혜진이가 말했다.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오려면 원피스 뒤집어쓰는 게 최고야.”
나는 카페 같은 데라도 들어가자고 했다. 혜진이는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평일 오후 한산한 정류장에 서 있는 혜진이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만나자마자 헤어지게 되어 아쉬웠지만, 혜진이를 기다리고 있을 혜진이의 첫째 아이, 태린이가 생각났다. 이 시간에 정말 혜진이가 여기 있어도 될까.
나는 혜진이네 동네에 가는 버스가 오는지 살펴보았다. 정류장에 오는 버스 중 수원으로 가는 한 대를 빼면 전부 S시로 가거나 S시를 거쳐 J시로 가는 버스였다. 현재 내가 사는 J시로 가는 버스는 S시 가는 버스의 삼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단 세 대뿐이었다. 그중에서도 S시 시내를 들어가지 않고 도시고속화도로인 제2자유로(路)를 거쳐 가장 빠르게 J시에 도착하는 버스는 번호 앞에 알파벳이 붙은 버스 단 한 대뿐이었다. 배차 간격 15분이라고 하지만 체감 30분은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마저도 아무나 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차에 단 39명의 사람만 탈 수 있었다. 내 뒤에서 승차가 끊기면 마치 버스 신의 선택이라도 받은 양 신이 났다.
한번은 서울 부모님 집에 갔다가 버스를 타러 광화문으로 갔다. 퇴근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버스는 줄이 그만큼 길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가는 버스 줄만 면세점 건물 앞까지 구부러졌다. S시 시내를 지나 J시로 가는 버스는 줄을 서지 않아도 됐지만, S시 시내를 돌아돌아 가느니 J시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오후 3시를 넘어가는 시간에 광화문에는 줄을 설 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다. 혜진이가 오자마자 멀리 버스가 한 대 보였다. 확률상 당연히 S시로 가는 버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내가 타야 할 버스였다.
혜진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 어느 일요일에 남편에게 첫째 아이를 맡기고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결혼 오 년 차에 애가 없는 친구, 애가 벌써 셋인 친구, 결혼하지 않은 친구, 결혼한 지 한 달 된 나. 다양한 구성원만큼이나 쉽게 넘어가는 이야기가 없었다. 혜진이가 첫째까지만 낳아야 한다고 하자 아이가 셋인 친구가 백한 가지 이유를 댈 기세로 공감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는 비혼주의자였다. 나보고 결혼 안 할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대충 대답했다.
“너 집들이 언제 할 거야?”
나는 결혼한 사람이면 누구나 받는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집들이를 하기 싫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가 결혼해서 신혼집을 J시에 얻었다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늘 똑같았다. J시? 아, S시 지나서? 네 남편도 서울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마치 짠 듯이 다들 그렇게 반문했다. 땅을 사서 지은 전원주택이라면 모를까. J시의 동의어를 ‘멀다’로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아무리 주택 청약에 당첨된 것이라 해도 서울에서 먼 도시의 13평 원룸 같은 아파트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S시에 사는 혜진이만이 자기랑 더 가까워졌다며 좋아했다. 혜진이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혜진이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과 헤어지고 혜진이와 함께 광화문 정류장에 갔다. 당연히 혜진이가 탈 버스가 먼저 왔다. 공휴일은 배차 간격이 더 넓어 나는 혜진이가 가고 난 후 뒤 20분을 기다려 버스에 탔다.
혜진이에게 오늘은 내가 먼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올라타려는 순간, 혜진이가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번호판 옆에 탑승 가능 인원수를 표시하는 숫자가 39에서 38로 바뀌었다. 따라 타며 혜진이를 불렀지만, 뒷문 바로 뒷자리에 가서 앉아버렸다.
“첫째 임신했을 때는 메스꺼워서 버스 잘 못 탔는데, 이번에는 괜찮아. 완전 신기하지. 그런데 지금은 지하철을 못 타.”
버스는 우리 둘만 태우고 문을 닫았다. 기사는 안전벨트를 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타면 너희 집 안가. 연세대에서 서면 그다음이 바로 우리 동네란 말이야.”
“알아.”
“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삼성생명 빌딩 앞에서도 서울역에서도 아무도 타지 않자 드디어 혜진이가 입을 열었다. 복잡한 사정도 아니었다. 혜진이가 늘 하고 싶다고 했던 일을 실천했을 뿐이었다.
아침 아홉 시에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면서 혜진이는 자기도 홀연히 어딘가 가고 싶어졌다고 했다. 집을 치우면서도 생각이 떨어지지 않던 혜진이는 혹시나 하면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부터 배가 많이 뭉치는데 애 나올 때가 돼서 그러려니 했어. 근데 점점 심해져. 분비물도 오늘 최고로 많이 나오네. 병원에 전화해 봤더니 진료는 볼 수 있는데 예약한 게 아니라서 대기 좀 해야 한 대. 조퇴할 수 있어? 지금 병원 가서 태린이 하원하는 시간까지 맞춰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메시지 옆에 숫자가 사라졌지만, 남편은 답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포기했던 혜진이는 점심시간 지나고 지금 조퇴한다는 남편의 답장을 받자마자 세탁소에서 찾아온 깨끗한 임부복을 꺼내 입고 바로 나왔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고 싶어 생각해 낸 곳이 명동이었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어깨를 부딪치고 다닐 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고 했다.
“임신한 애가 몸 좀 생각해.”
“야, 막달은 뛰어다녀도 돼.”
혜진이는 배만 처지지 않았어도 정말 뛰어다녔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보기에는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보다 배가 더 많이 나오고 무거워 보였다.
“걱정하지 마. 임신부 발레반에서도 내가 제일 잘 따라가. 애 낳을 때 되면 몸 안 좋다고 못 나오는 임신부들도 많아.”
혜진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혼자 보내는 시간’을 쪼개 임신한 사람을 위한 발레 수업을 들었다. 첫째 아이를 출산할 때 구청에서 들은 임신부 요가의 효과를 보고, 이번에는 운동이 더 된다는 발레에 등록했다.
“누워서만 지내는 사람도 있다던데 넌 정말 임신이 체질인가보다. 어떻게 셋째 생각은 있고?”
내내 올라가 있던 혜진이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왔다. 나를 한껏 째려보면서 명동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던 혜진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아도 막달이라 무거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카페는 주문받을 때 이름을 물어보고 음료가 나오면 이름을 불러 찾아가게 했다. 나도 가 본 적이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 1번 손님, 2번 손님으로 불리거나 멤버십에 등록한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혜진이는 정, 혜, 진, 세 글자를 똑바로 불러 달라고 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리에 앉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명동에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혜진이네 동네에서는 유모차에 커피를 꽂고 다니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임신부가 커피를 마신다고 펄쩍 뛰었다. 얼굴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애가 네 살인데 아직도 유모차를 태우냐는 소리도 덧붙였다.
“지들이 배 나와서 애 데리고 다녀보라고, 힘든가 안 힘든가. 몸이 두 개라 가만히 있어도 열이 나는데 차가운 거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사주고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들어는 드리지.”
통화할 때마다 내가 듣기에 비슷비슷한 푸념을 했다. 결론은 늘 같았다.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다.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있나. 결혼하고 생긴 나의 고민에 혜진이는 성의껏 대답해줬지만 나는 혜진이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내가 공공재냐고. 아니다, 내 새끼가 공공재인가보다. 아직 밖에 나오지도 않은 애는 내일의 주인공이라고 살뜰히도 챙겨요!”
혜진이 목소리가 커지자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서울에서 마지막 정류장인 연세대 앞에서 어떤 남자 한 명을 태웠다. 우리를 보더니 더 뒤로 오지 않고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오늘 선택받은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거짓말까지 하고 나왔으면 더 재밌는 걸 하지. 나한테 미리 전화하든가.”
실은 그 시간에 면접을 보고 있었으면서 나는 혜진이가 부르면 바로 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했다.
“제일 하고 싶었던 거 하려고 이 버스 탄 거야. 그리고 버스 타기 전에 혹시나 해서 너한테 전화해 본 거고.”
버스는 상암동을 지나 제2자유로에 들어섰다. 면접을 봤다고 혜진이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너는 애가 없으니까 그런 것도 하는구나.’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부터 혜진이는 내가 면접을 봤다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고 하면 자판기처럼 저 말을 했다. 나도 혜진이에게 ‘네가 이해해, 임신부라서 걱정하는 거지’라고 자판기처럼 말을 했다.
혜진이는 첫째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받았다. 회사로 복귀해야 했던 시점에 손녀를 봐주기로 했던 어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시어머니는 애를 봐준다는 말도 없었을뿐더러 시아버지를 혼자 두고 S시로 올 수도 없었다. 애만 시가에 보낸다고 해도 주말마다 애를 데리러 대구까지 왔다 갔다 할 자신도 없었다. 혜진이는 퇴사했다.
“비바 라 비다!”
혜진이가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기사 뒤에 앉은 남자가 우리를 쳐다봤다. 혜진이는 소리 좀 줄이라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계속 말했다.
“살고 싶다, 저기.”
혜진이는 창문에 입김을 불고 크게 하트를 그렸다. 하트 너머로 S시 가운데 우뚝 솟은 주상복합 아파트 ‘비바 라 비다’가 보였다. S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광고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저기. 혜진이는 하트 끝에서 오른쪽 대각선 아래로 화살표를 그었다.
“네가 하고 싶었던 게 남의 집 구경이야?”
“비바 라 비다는 구경 말고 살고 싶은 거고.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지금 이거야.”
혜진이가 눈앞에서 주먹을 쥐고 쌍안경으로 보듯 창문에 갖다 댔다.
“우리 집 지나가는 거. 우리 집이 있는 S시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거.”
앞에 앉은 남자 머리가 들썩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가 말할 때마다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제2자유로는 S시 가장자리를 둘러 J시로 바로 들어갔다. 나는 혜진이가 그은 화살표 끝을 바라보았다. 혜진이네 집은 내가 맨 처음 청약을 넣었던 아파트였다. 혹시라도 당첨된다면 나와 남편과 은행이 전세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곳 중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예비신혼부부 자격으로 넣었지만 떨어지고 J시에 있는 아파트가 되었다. 아마 혜진이처럼 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순위가 밀렸겠지.
“인싸 정혜진 어디 갔냐. 맨날 혼자 있고 싶다 그러고.”
“나 인싸로 돌아간다. 주부 연극 모임 만듦.”
나는 황당해서 왼손 둘째, 셋째 손가락으로 브이 모양을 한 혜진이 손 말고 배를 쳐다봤다.
“야! 너 다음 달에 애 낳으러 가야 돼!”
“일단 오늘의 주인공이 있어야 내일의 주인공도 있는 거야.”
혜진이가 앉아도 가슴까지 솟은 배를 손가락으로 노크하듯 두드렸다. 이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철학 수업에서 혜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전공도 아닌 교양 수업에서 신입생만 있던 우리 조 애들은 서로 조장하기 싫다고 신경전을 벌였다. 네가 하니 네가 하니 시끄러운 속에서 혜진이는 보란 듯이 책상을 똑똑똑 두드렸다. 모두 자기를 쳐다보자 혜진이가 말했다. 조장은 내가 한다. 순간 버스가 덜컹거렸다. 나는 혜진이 앞으로 벨트처럼 손을 뻗었다. 혜진이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배를 감싸 안았다.
“그래서 넌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갑자기 마이크가 넘어왔다. 내가 혜진이의 진짜 웃음을 알아봤던 것처럼 혜진이도 내가 할 말이 있는 걸 알아봤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혜진이의 배만큼은 아니어도 내 가슴까지 솟은 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만나기 전에 면접을 하나 봤거든. 들어가자마자 면접관이 날 쳐다보는 것부터 성의가 없더라고. 오늘도 망했네 싶었지. 그래도 별수 있어? 준비된 노예라고 매력 발산이라도 하고 와야지. 그런데 일어나기 전에 뭐라는 줄 알아?”
남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남자가 우리에게 걸어올 것만 같았다. 남자는 상체만 뻗어 기사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가 다시 상체를 숙인 것을 확인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남편은 무슨 일 하세요? 나보고 그렇게 물어보더라니까. 그동안 본 면접에서 일하다가 임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도 그런 것만 물어보길래 이번에 지원할 때 이력서 가족 관계에 부모님만 썼어. 그랬더니 예전 회사에다가 물어봤는지 어쨌는지 알아봤나 봐. 남편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다가 신상 다 까발려진 마당에 될 대로 되라 남편은 태평건설 다닌다고 했지. 나한테 대답을 안 할 권리는 또 없잖아? 야, 아직 인상 쓰지 마. 이다음이 본론이니까. 남편분이 대기업 다니시면 맞벌이 안 하셔도 되겠네요. 자녀 계획은 있으시죠? 날 왜 불렀을까? 사람 뽑는 거 아니었냐고. 세상에 있지도 않은 내 자식 컨설팅해 주려고 불렀나 봐.”
“푸하하하.”
내가 맞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분명히 비웃음이었다. 쟤 뭐냐? 혜진이가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남자는 계속 소리 내며 웃었다. 버스 기둥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는 버스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의자 등받이 하나하나 붙잡아가며 앞으로 나갔다.
“이봐요, 지금 우리 보고 웃었어?”
남자 옆에 의자를 붙잡고 통로에 섰다. 남자는 자기 옆까지 온 나를 올려다봤다. 손에 든 휴대폰에 지난 주말에 했던 예능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다. 남자가 한쪽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뭐라고요? 이어폰에서 박수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면에는 얼마 전 결혼한 남자 연예인이 작은 아기 원피스를 만져보고 있었다. 화면 아래로 큼지막한 자막이 떴다. 「이미 딸 바보 예약」 기사가 내게 말했다.
“나오지 마세요. 위험해요.”
남자는 우리보다 한 정류장 먼저 내렸다. 창밖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무시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는 다음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내가 벨을 누르는 걸 보고 혜진이도 내릴 채비를 했다. 나는 먼저 일어나서 혜진이 팔을 잡고 부축해줬다. 드디어 혜진이도 J시에 입성했다. 광화문에 한 대밖에 서지 않는 알파벳 버스가 엄선한 사람으로 채워 넣은 J시. 혜진이를 더 안으로, 우리 집으로 초대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집에나 가자.”
혜진이가 대답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혜진이 휴대폰이 울렸다. 혜진이는 네 번 울릴 때까지 액정만 보다가 결국 받았다.
“4년을 같이 살았으면 좀 친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옆에 서서 혜진이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내 휴대폰도 울렸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였다.
「1시에 면접 보신 최빛씨 맞으시죠? 통화 괜찮으세요?」
「네, 말씀하세요.」
「재무팀으로 경력 지원해 주셨는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 채용은 내부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내가 또 맞았다. 면접 본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었다. 면접 본 지 몇 시간 만에 채용을 취소하는 회사치고 괜찮은 회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시구나 건성으로 대답했다.
「혹시 경영지원팀에서 출산휴가 대체 인력을 구하고 있는데 그쪽으로 지원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기혼자이시니까 임신도 생각하실 테고요. 8개월 정도 일하시는 거 괜찮으실 텐데요. 일반기업에서 7년 정도 일하셨으면 충분히 하실 수 있고요.」
얼굴도 모르는 인사팀 직원이 동아줄을 붙잡으라는 듯 말했다. 혜진이도 나도 전화를 끊었다. 서로 말이 없었다. 우리가 정류장에 서 있는 동안 강남에서 11명, 여의도에서 2명, 서로 다른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이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가 봐야겠다. 엄마 안 온다고 태린이 운대.”
내 첫 초대장이 날아가자마자 찢어졌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들어가야 하는 곳이 안인지 바깥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곳으로 손님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콜택시를 불러놓고 혜진이에게 말했다.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검은색 원피스는 입지 말자. 둘이 손잡고 장례식장 가는 것도 아니고.”
“검은 옷 입었다고 다 같은 데 가는 거 아니거든.”
혜진이를 태운 택시가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혜진이의 말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 우리는 안으로 더 들어가고 있지만 그게 같은 방향은 아니었다. 택시를 등지고 걸었다. 저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가 작게 보였다. 우리집 정류장에서 5분이면 가는데. 눈을 비비자 아파트가 더 작아졌다. 저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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