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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un 30. 2024

발길이 닿을 곳이 없을 때,  잠수는 어때?

part1. 숨을 쉬고 싶어서

돌아갈 제자리가 사라졌다. 발길이 닿을 곳이 더 이상 사라졌다. 방황이 시작되었다. 갈 수 없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애초에 돌아갈 곳이 있긴 할까?




내가 가장 방황할 때는, 내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휘둘릴 때다. 물론 매번 휘둘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나를 너무 잘 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얼마나 강하고 무엇에 약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약하고 어떨 때 강해지는지. 내 사람을 얼마나 잘 지켜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지를 너무 잘 안다. 그런 내 사람들이 나를 휘두르는 것은 결국 나를 너무 잘 알아서다. 일부로 자극을 줘서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혹은 그냥 던진 돌에 지금 개구리인 내가 맞아 멍이 든 것이거나.



나는 늘 알아서 하고, 결정해 오는 스타일이었다. 의존하는 것을 좋아하나 싶으면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좋아한다. 많은 의견과 정보가 모이면 그것을 선택하는 편에서 더 유리하니까.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그 사람의 말을 100%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선택한 것 역시 나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원망하면 안 된다. 내 인생의 선택자는 결국 나이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무언가를 구상하고, 거의 실행할 때쯤이거나 실행 중에 나는 내 지인들이나 가족들, 친구들에게 나의 일상을 오픈한다. 무거운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때론 나와 아주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나의 일상을 더 많이 알고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거나 좋은 의도로 하지 않는 말은 걸려서 들으면 된다. 다만 진심으로 해주는 말은 조언 삼아 적당히 사용하면 된다.




나는 깊고 오래가는 관계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내 곁에 두는데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는 편이다. 내 감정과 생각을 이들과 더 공유를 많이 하고 싶다. 특히 ‘감정’. 나는 감정이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다. 상처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오히려 ‘너무 무심하다’라는 말과 ‘철벽을 친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를 위한 방어막이다.



사람마다 누군가와 다툼이 있었을 때, 바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누군가는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난 후 대화를 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혼자 생각하고 감정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 지인 중 상당수가 내가 이런 나의 성향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해해 주려고 한다거나, 배려해 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 관계들 속에서 버티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그들에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내가 참고 나를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노력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혼자만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내게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잠수’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영향이 닿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나’를 돌아보고 돌봐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편안한 상태에서 숨을 쉬지는 못하더라도, 당장 숨을 쉴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가슴에 멍이 가득한 상태가 반복되다 보니, 멍이 지워지지 않고 상처만 곯아갈 뿐이었다. 누군가는 나의 선택이 결국은 비겁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타인에 의해 받은 상처를 내가 살기 위해 치료하겠다는 걸. 선택지에 ‘도망’이란 것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이 비겁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비겁한 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난 그렇게 도망을 선택했다. 감정에 한계가 와서 더 이상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웠고, 미련한 나를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 단순히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너무 살고 싶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기에 있어, 나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에 내면의 소리를 외면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꼭 들어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시간 지나, 이제 나는 때론 ‘잠수’ 타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그 맛을 알았을 수도, 중독되었을 수도 있다. 내가 겪어본 잠수는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내면의 평화’였다.



잠시나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참으면 들리던 소음과 다양한 모든 것들이 감춰진다. 그 순간부터 모든 감각은 더욱 선명해지고 오롯이 정신과 남아있는 숨에 집중된다.



고립이다, 자발적인 고립. 이 순간, 이 느낌을 찾고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가. 몇 가지 감각들에 집중하고 오로지 내가 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 순간을 기억해 현재 나의 마음속 비밀 상자에 꽁꽁 싸매어 넣어둔다.




잠시 멈춰있던 그 순간과는 다르게 코로 숨을 쉬고, 온갖 자극들이 가득하지만 오로지 나만을 느꼈던, 고립되었던 순간이 가장 짜릿함이 또렷했던 그 순간이 종종 떠올려진다.



귀에 들리는 잡음과 수많은 유혹을 뒤로한 채 남아있는 시간과 정신에 집중한다. 자발적 고립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목표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숨을 쉬고 싶어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숨을 쉬고 싶어서 숨을 참는 방법을 배운다.

단지... 숨을 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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