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tevedra
오늘은 22km 정도를 걸어 '폰테베드라'까지 걷기로 하고, 미리 숙소를 예약해 뒀다. 당일 선착순으로 알베르게를 잡는 순례자들도 많지만, 우린 두 명의 예약을 한꺼번에 해야 해서 혹시 자리가 없을까 봐 전날 미리 잡아두는 편이다. 인기가 많은 숙소는 며칠 전에 미리 잡아두기도 했다.
오늘 코스는 산길이 많았다. 걸어온 거리가 늘어날수록 내 발에도 통증이 늘어났다. 물집도 잡혔던 자리에 계속 잡히고, 발목과 발바닥도 욱신거렸다. 소염진통제를 꾸준히 복용 중임에도 통증은 계속 동반됐다.
반면, 유림이는 오늘따라 엄청 잘 걷는다. 완벽 적응을 했는지,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계속 ‘올라!’를 외쳐주며 힘차게 걸어 나간다. 어느새 저렇게 잘 적응해서 나보다 훨씬 잘 걷게 되었을까? 순례길 초반 정도만 해도 발이 아프다며 징징거리고 힘들어하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신나게 걸으며 나와의 거리를 점점 더 벌리고 있었다. 쭉쭉 앞으로 걸어 나가는 유림이의 발과, 그 속도를 따라주지 않는 나의 무거운 발. 그 간극에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하루하루 어른이 되어가는 나의 어린 딸이 대견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좋은 점이 참 많다. 강렬한 태양을 나무들이 막아줘서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새가 노래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등 여러 가지 자연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흙냄새, 풀냄새 등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냄새까지 맡으며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경사가 가파른 구간이 나오면 체력적으로 엄청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산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순례자들이 엄청 많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엔 아이스박스에 시원한 물과 음료를 담아두고 판매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마치 한국 등산로 꼭대기에 막걸리 파는 가게가 생각났다. 많은 순례자들이 음료를 마시거나 잠시 쉬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림아, 우리도 여기서 시원한 물 한병 사서 마실까?”
“응. 나도 시원한 물 마시고 싶었어.”
사실 난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었지만, 산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급해질 까봐 참았다.
“물 한병 주세요. 얼마예요?”
나는 서툰 스페인어로 말하고 물을 한병 받았다. 그런데, 물을 주신 분이 엄청 빠른 스페인어로 수다쟁이처럼 뭐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아저씨, 천천히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말 엄청 빠르시네. 그래서 얼마라는 거야?’
“종교단체에서 음료 나눔을 하는 중이에요. 물 값을 내길 원하면 기부금 상자에 원하는 만큼만 넣으면 된데요.”
내가 물통을 계속 가르치며 얼마냐고 되묻자, 내 옆에 서있던 순례자 한분이 영어로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조금 걸어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 길이 걷기 더 좋다고 알려주시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순례자 한 분의 친절 덕분에 좋은 정보까지 얻게 되었다. 우린 동전을 찾아 기부금 상자에 넣고, 시원한 물을 마셨다. 그리고 기분 좋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폰테베드라에 예약해둔 숙소는 여성전용 도미토리 룸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 방은 이층 침대 두 개가 있어서 네 명이 함께 쓰는 방이었는데, 먼저 도착한 두 명이 일층 자리를 이미 쓰고 있어서 우린 둘 다 이층을 써야 했다.
“올라!”
우리는 일층에 앉아있던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가방을 내려놨다.
“저, 혹시 어제 레돈델라에서 ㅇㅇ알베르게에 묵지 않았었나요?”
일층에 앉아있던 두명중 한 명이 어제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었었다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서양 사람들 이어서 우린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기억에 잘 남았었나 보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걸은 길에 대해 짧은 대화도 나누었다. 스페인 세비야에 산다는 그녀는 다섯 살 아들을 둔 엄마였다. 어린 아들이 있는 엄마가 왜 혼자서 순례길을 걷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요즘 스페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나이인 33세에 순례길을 걷는 걸 중요한 의식처럼 생각하는 문화가 있어요. 그래서 저도 33세가 지나기 전에 나의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죠.”
“그렇군요. 스페인에 그런 문화가 있군요?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서, 씻고, 빨래를 하고, 저녁을 먹느라 밤이 되어서야 그녀를 방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어린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화면 속 아이는 엄마에게 사랑스러운 키스세례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서 온 엄마 친구와 그녀의 딸이야. 인사해 봐. 헬로~ 해봐.”
그녀는 나와 유림이에게 영상통화 화면을 보여주며 아들에게 우릴 소개해줬다. 하지만, 자기 엄마에게 키스세례를 퍼붓던 아이는, 우리를 보자마자 부끄럼쟁이로 바뀌어버렸다. 입을 꾹 닫고 살살 웃기만 하는 아이에게 우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반가워!”
유림이도 아이가 귀엽다며 손을 열심히 흔들어줬지만,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아이는 화면 밑으로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급 민망해진 아이의 엄마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유림이도 어린아이였을 때 뽀뽀도 잘해주는 애교쟁이였던 기억이 살포시 떠올랐다. 아이들은 참 빨리 자란다. 그때는 그 걸 잘 못 느끼다가, 훅 커버리고 나면 알게 된다. 눈앞에 어느새 쑥 커버린 유림이가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서 조금만 천천히 어른이 되어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