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ondela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했다. 오늘은 '레돈델라'까지 15km 정도만 걷기로 했다.
동트는 아침에 '오 포리뇨'를 출발하며, 아쉬운 마음에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본다. 아름다운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이 매번 아쉽다.
이제는 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만의 규칙이 생겼다.
1. 강렬한 태양을 조금이라도 피하려면 아침 6~7시 사이에는 출발하기.
2. 시원할 때 많이 걷다가 카페나 식당에서 첫 휴식과 아침식사를 한 번에 해결하기.
3. 다음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이 2시 전이면 점심은 도착지에서 먹기.
걷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좀 더 효율적으로 걸을 수 있는 요령도 함께 늘어난다.
오늘은 12시쯤 레돈델라에 도착되어서, 예약해 둔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호스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체크인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이런 날은 여유 있게 점심식사를 할 식당을 찾아보고, 그곳에서 천천히 식사하며 체크인 시간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레돈델라에 우리가 예약해 둔 알베르게는 커다란 방 하나에 싱글침대 10개 정도가 놓여있는 곳이었다. 침대 사이에는 파티션 정도의 공간 분리만 되어있어서, 그냥 한방에서 다 같이 자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우리 맞은편 침대를 쓰는 키가 큰 서양아저씨가 침대에 이미 누워 있었다. 누운 채로 과자를 와그작거리며 먹다가, 그대로 코를 골며 자다가를 반복하는 아저씨가 너무 웃기면서도 살짝 짜증이 났다. 과자를 먹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 중에 어떤 게 더 시끄러운지 판가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이 방에 사람들이 가득 차면 또 어떤 소리들이 들려올지 기대(?)가 되었다.
씻고 빨래를 하고 좀 쉬다 보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우린 7시쯤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스페인은 일몰 시간이 밤 10시는 돼야 해서, 아직도 대낮처럼 타는 듯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우리 여행 일정 중 최고로 더운 날이었다. 그런데, 이 더위에 에어컨도 안 틀고 있는 식당들이 너무 많았다. 우린 근처 식당을 정하고 실내에 들어가 앉았다가, 찜질방 수준인 더위에 질려서 밖에 테라스 자리로 옮겨 앉겠다고 말했다. 찜통보다는 그늘에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늘 속이어도 올라오는 지열 때문에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우린 정말 바쁘게 식사를 했다. 빨리 먹고 숙소로 돌아갈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 다른 테이블 사람들은 더위를 못 느끼는 건지 여유롭게 천천히 식사 중이었다. 서양사람들은 더위를 견디는 수준이 우리랑 다른 건가? 이 땡볕에 우리나라 코끼리열차 같은 관광열차를 타고 뜨거운 도로 위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우린 혀를 내둘렀다.
스페인으로 넘어오니 포르투갈과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확실히 영어가 잘 안 통하는 곳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소통의 불편함이 크게 없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이 많이 머무는 도시는 그래도 영어가 통하는데,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 들리게 되는 식당이나 카페, 상점들 대부분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했다. 유림이와 나는 스페인으로 넘어와서부터, 숙소에서 쉬는 동안 틈틈이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공부라고 하기엔 우습지만, 휴대전화 속 번역기 앱을 이용해서 우리가 자주 써야 하는 단어 위주로 짧게 외워두고 그 상황에 맞게 쓰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 전략은 의외로 잘 통했다.
식당에서 내가 주로 주문하게 되는 맥주, 와인, 커피의 종류, 메뉴 이름 정도와 한 개, 두 개 등의 숫자 단위가 들어간 단어 정도를 중얼중얼 거리며 외웠다. 걷는 동안도 유림이와 함께 중얼거리다가 무언가 주문해야 할 상황에 바로 써먹다 보니, 잘 외워지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우나(한잔) 쎄르베싸(맥주), 뽀르 빠보르(주세요).”
“코파 데 이엘로, 뽀르 빠보르.(얼음잔 주세요.)”
내 말을 알아듣고 우리가 주문한 것을 정확히 갖다 주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말을 하다가 모르는 단어는 냅다 손짓 발짓을 동원하고 그 뒤에 바로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만 갖다 붙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는 단어의 수도 늘어나고, 응용해서 사용하기도 가능해졌다.
“우나 아구아(물), 코파 데 이엘로, 뽀르 빠보르.”
문법상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단어를 최대한 활용해서 말을 했다. 그럼 신기하게 물 한 병과 얼음이 담겨있는 컵을 갖다 줬다. 점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와인도 주문해 봤다.
“우나 삐노(와인), 뽀르 빠보르.”
너무 당당하게 말하고 다음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주문을 받으시는 분이 스페인어로 뭔가 질문을 했다. 당연히 알아듣지 못하고 손짓 발짓으로 어렵게 주문을 마쳤는데, 알고 보니 그건 와인의 종류와 한잔인지 한 병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주문하는 실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우나 코파 데 삐노 띤또, 뽀르 빠로르.(레드와인 한잔 주세요.)”
“우나 코파 데 삐노 블랑코, 뽀르 빠보르.(화이트와인 한잔 주세요.)”
이 정도면 여기서 먹고사는데 문제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스페인어를 열심히 써먹었다.
한국에서 죽으라고 영어공부를 해도 안 떨어지던 입이, 왜 어학연수나 유학을 다녀오면 유창하게 말하게 되는지 정확히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역시 언어는 실전이다. 속성암기식 스페인어 공부였지만, 순례길을 걷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되고 좋은 추억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