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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작가 Oct 20. 2024

카민하

Caminha

  아침부터 비가 와서 처음으로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제대로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도시인 카민하까지 약 33km를 걷기로 한 날이다. 그동안 아껴뒀다가 한방에 쏟아붓는 것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 하필 제일 많이 걸어야 하는 오늘이라니.

맑은 날이 이어질 땐 무게가 꽤 나가던 판초우비를 버려버릴까 고민도 많이 했었는데, 그러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산 싸구려 우비로 막기엔 너무 강력한 비였다. 우비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이 옷과 가방을 적셨고, 우린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우비의 모자 끈을 단단히 조여 묶었다.

흙탕물이 시냇가처럼 흐르는 산길을 조심해서 걸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빗소리와 걸을 때 우비가 스치는 소리, 우비 모자 안으로 울리듯 들리는 내 숨소리뿐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원래도 느린 편인 우리 걸음을 더 무겁게 붙잡고 늘어졌다. 축축해진 운동화가 이내 양말까지 질퍽하게 다 젖어 버렸고, 그 상태로 몇 시간을 더 걷고 나니 내 다리가 돌덩이로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등산로처럼 외진 산길이라 카페도 없고 비를 피해 쉴 곳도 없었다.      


“유림아, 조금만 힘내자. 이 산길만 끝나면 분명 카페나 식당이 있을 거야.”     


“…….”     


유림이는 말을 잃었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수행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계속 걸었다.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나를 훨씬 앞서서 걸어 나갔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너무 강해서 핸드폰도 꺼내 보지 못하고 걸었더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이 지나고, 반가운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조금 더 걸어가니 길가에 아주 작은 식당이 보였다. 메뉴가 뭐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비를 피할 곳과 앉아서 쉴 곳이 간절했던 우리는 옴팍 젖은 우비를 식당 밖 의자에 걸어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우리와 같은 처지인 순례자들이 이미 만원인 상태였고, 우린 겨우 구석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젖은 발을 조금이라도 말리려고 노력 중이었다. 우리도 빠르게 식사를 주문한 후 신발을 벗고 앉아서 꿀 같은 휴식시간을 보냈다.      


“유림아, 너 아까 말도 한마디 없이 계속 걷더라?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응? 아니. 나 노래 부르면서 걸었는데? 빗소리에 맞춰서 노래 부르며 걸으니까 별로 안 힘들더라고.”     


대박 반전이었다. 역시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맞나 보다. 맞으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걸었다는 딸아이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또 성장하는구나. 너도, 나도.


아직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지 않을 때여서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우리가 천천히 식사를 하는 동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잠시 벗어뒀다고 마를 리 없는 질퍽한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이미 안쪽까지 다 젖어버린 우비를 다시 접어서 가방에 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과감하게 우비를 식당 앞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제 비가 다시 온다면 그땐 양산 겸용으로 챙겨 온 작은 우산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다시 출발했다.      

아까 비가 내리던 날과 같은 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화창한 하늘과 질퍽이는 운동화가 너무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걷다가 이럴 거면 차라리 슬리퍼를 신고 걷는 게 났겠다 싶어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운동화는 비닐봉지에 넣었다.   

  

“엄마, 발이 너무 아파,”   

  

험한 길을 너무 오래 걸었다. 무리가 되었는지 유림이가 발 통증을 호소했고, 심지어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발바닥에 물집도 잡혔고, 발등도 아프다고 하는 거 보니 염증반응도 있는 것 같았다. 준비해 간 소염진통제를 먹였다.     


“유림아, 너무 힘들면 택시 타도 돼.”     


“응. 조금만 더 걸어보고 너무 아프면 말할게.”     


유림이는 결국 불편한 발로 끝까지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33km를 출발한 지 열한 시간 만에 완주했다. 중간중간 쉬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느라 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나도 걸을 때 새끼발가락이 아팠다. 씻고 나와서 서로의 발을 확인해 보니, 물집이 잡혀있었다. 챙겨간 바늘과 실을 이용해서 유림이 발바닥과 내 새끼발가락에 있는 물집을 터트렸다. 그리고 동네 마트에서 사 온 인스턴트식품들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나서 둘이 같이 소염진통제를 먹었다. 걷기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니 누적된 피로가 이제 통증으로 나타나는 듯했다. 그래서 내일 하루는 걷지 않고 여기서 쉬기로 했다. 힘들어서도 있지만,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도시인 카민하에서 좀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젖은 운동화와 모자를 말리고, 빨래를 하고, 늦잠을 자면서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걸어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질퍽한 운동화를 신고 걷다가 결국 슬리퍼로 갈아 신고 운동화는 들고 걸었다.
바늘로 물집을 통과 시키고 실만 남겨두면 다음날 깨끗이 나아있었다. 다행히 햇빛이 좋아 신발과 모자가 잘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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