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이제는 익숙하게 가방을 꾸려 출발한다. 하지만 발 통증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걷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인데, 처음 출발 할 때가 너무 아프고 힘들다.
오늘따라 출발부터 다른 순례자들이 많이 보인다. 우리처럼 피곤과 통증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아닌, 뭔가 활기차 보이고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행들끼리 함께 모여서 걷는 모습도 꽤 보였다.
포르투갈 길은 프랑스 길에 비해 순례자들이 많지 않지만, '뚜이'에서부터는 순례자들이 꽤 늘어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순례길 완주증명서를 발행해 주는데, 100km 이상을 걸어야만 받을 자격이 된다는 기준이 있다. 그런데 딱 '뚜이'에서부터 걸으면 100km가 좀 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유림이와 둘이서 걷는 길이 대부분이었고, 가끔씩 보이는 순례자 중에서도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하지만 '뚜이'에서 출발해 보니 동양인도 종종 보이고, 훨씬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심지어 어린 아기를 업고 걷거나, 강아지와 함께 걷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걷기 좋은 숲길이 이어진다. 부쩍 늘어난 순례자들 덕에 활기가 느껴지는 길이다.
오늘 우리는 '오 포리뇨'라는 마을까지 약 17km 정도 걸을 예정이다. 계속 소염진통제를 먹고 있는 우리의 컨디션을 위해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출발해서 걷다 보니 숲길과 산길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예쁜 길이 이어졌다. 낮은 산길을 헉헉 거리며 올라가다 보니 멋지게 벽을 꾸며놓은 곳이 있었는데, 그 앞에 산티아고까지의 거리가 쓰여있는 표지석과 노란 벤치가 눈에 확 띄었다. 다리도 아픈데 잠깐 쉬었다 가기로 하고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때, 어떤 소년이 우리 뒤를 따라오던 순례자들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그 소년의 손에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가 들려 있는 걸 보니, 이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들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앉아서 그 소년을 지켜봤다. 장사 수완이 꽤 좋아 보였다. 무시하고 갈 수도 없는 좁은 길에 자리를 잡고, 지나는 사람들 눈앞에 조개껍데기를 흔들어 보이며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었다. 왼손으로 '브이'를 하듯 두 손가락을 펼쳐 들고 외치는 걸 보아, 조개껍데기가 2유로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잠깐! 왜 우리가 지나왔을 땐 조개껍데기를 사라고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지? 돈이 없어 보였나? 사라고 안 하니까 이것도 은근 서운하네.’
포르투에서 출발할 때부터 조개껍데기가 보이면 사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걷다 보니 깜빡 잊어버리기도 했고, 다른 순례자들 가방을 보고 생각났을 때에는 조개껍데기 파는 곳이 내 눈엔 보이질 않았다.
“유림아~ 우리도 순례자니까 조개껍데기 하나씩 사서 가방에 달고 걸을까?”
“혹시 쟤가 비싸게 팔면 어떻게 해?”
“2유로면 비싸게 파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동안 파는 곳도 잘 안보였으니, 그냥 지금 사서 가방에 달자.”
역시 짠순이 딸내미답게 바가지요금을 내고 구입하게 될까 봐 걱정을 한다.
호객행위 없이 스스로 구입하겠다고 말하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우린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소년은 내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돼 보이는 아이였는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학교를 안 가고 알바를 하는 건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것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거 두 개 살게요.”
내가 손가락 두 개를 피고 조개껍데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소년은 손가락 네 개를 펴서 4유로라는 걸 알려줬다.
나는 가방 안에 있는 묵직한 동전들을 조개껍데기 값으로 다 써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동전이 3.85유로 밖에 없었다.
‘어쩌지? 깎아달라고 해볼까? 아, 애를 상대로 그건 좀 너무 한가? 에잇! 안된다고 하면 그냥 한 개만 사면되지 뭐.’
나는 마치 스페인의 화폐단위를 잘 모르는 것처럼 내 손바닥 위에 동전을 한가득 올려놓고 소년에게 보여줬다. 소년은 내 손바닥에서 동전을 하나하나 세어보더니 돈이 모자라다는 듯한 말을 몇 마디 했다. 그런데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조개껍데기 두 개를 주며 가져가라고 했다.
“땡큐~ 그라시아스!”
우리는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각자의 배낭에 조개껍데기를 단단히 묶었다. 그 후 산티아고 까지 걷는 동안 우리 배낭에 묶여 달랑거리던 조개껍데기는, 깨진 곳 하나 없이 한국에까지 잘 가지고 들어왔다. 왠지 이 조개껍데기를 가방에 매단 이후부터 발 통증이 좀 덜 해진 것 같았는데, 그건 우리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 조개껍데기를 팔던 자리. 우리도 커다란 조개껍데기로 배낭을 장식했다.
'오 포리뇨'로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개껍데기를 매달고 산을 내려와서 좀 걷다 보니,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설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보아하니 거의 직선으로 뻗어있는 길과, 엄청 멀리 둘러서가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 같았다.
“유림아, 우리 어느 길로 갈까?”
“멀리 돌아가는 길은 더 많이 걸어야 하잖아? 그냥 짧은 길로 가자. 엄마!”
역시 유림이는 더 많이 걷게 되는 길보다는 가까운 길을 선택했다. 나도 다른 정보가 없었기에,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 있나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일자로 쭉 뻗어있는 아스팔트 도로 양 옆으로, 공장들만 늘어서 있는 지루한 길이 시작된 것이다. 내리쬐는 태양의 뜨거움을 피할 그늘도 전혀 없는 길엔, 차가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일요일이라 공장이 다 쉬는 날이어서 인듯했다.
똑같은 길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우리 눈앞에 보이는 광활한 도로의 끝은 가까워질 줄을 몰랐다. 간혹 우리처럼 이쪽 길을 선택한 순례자들이 보였지만, 서로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자꾸 뜨거운 여름날 다시 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짝 말라죽어있던 지렁이가 생각났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말이 맞았다. 우린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을 걸어 '오 포리뇨'에 도착했다. 우린 다음에 우회하는 길이 나온다면 좀 멀더라도 꼭 그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