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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Mar 08. 2022

이뤄지지 못해 더 아름다운
한여름의 로맨스 ①

테네시 윌리엄즈, <여름과 연기>

[앨머] "아니오"라고 말하던 그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그녀는 지난 여름에 죽었어요-그녀 속에서 타고 있던 그 어떤 것에서 발생한 연기에 질식해서요. 네, 이제 그녀는 죽고 없어요. (2막 11장, p261)

사랑이야기보다 짜릿한 ‘썸타는 이야기’

    사람들은 왜 로맨스물에 끌리는 걸까요? 아마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대리만족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나 최근에는 서로의 사랑을 알듯말듯한, 이른바 '썸을 타는' 그 시기의 짜릿한 설렘을 담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죠.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감동적인 이유도 ‘썸’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설렘이 있기 때문입니다. 썸타는 이야기가 짜릿하고 흥미로울 수록 그 뒤로 이어질 사랑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감동이 더 커지는 법이죠.

   하지만, 해피엔딩만큼이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로의 사랑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엇갈리는 그런 이야기들이요. <여름과 연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들 말이죠. 요즘 로맨스물의 흥행요소인 (1) 동네 친구와의 사랑 (2) 밀당과 썸타기 (3) 엇갈린 사랑을 모두 담아낸, 원조맛집 같은 이야기죠. 그럼, 여름의 열기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연기처럼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사랑이야기를 만나볼까요?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여름과 연기>는 앨머와 존,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글로리어스 힐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분수대에서의 풋풋한 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성장합니다. 어른이 된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첫키스의 설렘을 떠올리게 되죠.

[앨머] 정말이지, 당신은 조금도 안 변했어요. 당신은 절 당황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여전히 그렇군요. (1막 1장, p77)

   어린 시절부터 앨머에 대한 호감으로 그에게 장난을 쳐왔던 장난꾸러기 존은 어른이 된 후에도 앨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장난과 농담의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존의 호감 표현인지 몰랐던 앨머는 장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존은 이런 앨머의 반응을 보며 자신만의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죠. 존은 그런 앨머에게 돌직구를 날리며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존] 사람들이 당신을 쳐다봐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진정 좋아한다는 걸 모르세요, 앨머 양? (1막 1장, p87)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연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썸만 타고 있을 뿐이었죠. 1막 1장은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드라이브라는 상황과 연결해 표현합니다.

[존] 드라이브하는 거 어때요?
[앨머] (매우 열심히) 언제... 지금요?
(...)
[존] (매우 무관심하게) 오... 언제 한번 봐서 오후예요.
[앨머] 제한 속도를 지키실 거예요?
[존] 당신과 함께라면 철저하게요, 앨머 양.
[앨머] 그렇다면, 저도 기꺼이 가겠어요—존. (1막 1장, p89)

   여기서 ‘제한 속도’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앞으로의 사랑과 갈등을 암시합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사랑의 속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죠. 두 사람은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인 카지노의 술집으로 향하는데요.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합니다.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존은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영혼을 중시하는 앨머는 그런 존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죠.

[앨머] 제가 조금 진지하게 데이트를 한 건 세 번 뿐이었어요. 그런데 매번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었어요.
[존] 사막이라뇨?
[앨머] 오—사람이 살 수 없는 넓디넓은 땅 덩어리요.
[존] 그야 당신이 쌀쌀하게 굴어서 그렇게 된 거겠죠.
(...)
[존] 그럼 뭐가 문제였죠?
[앨머] 저는—그 속에 제 마음이 없었어요. (그녀가 모호한 웃음을 웃는다.)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흐르곤 했어요. 아시죠, 침묵? (1막 6장, pp173-175)

   앨머는 존을 사랑하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열지는 못합니다. 그런 앨머를 보며 존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해를 하게 되죠. 그만큼 사랑에서 두 사람의 속도가 맞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이 카지노에서의 대화 이후로 계속해서 엇갈립니다.


육체와 영혼, 그 사이에서 엇갈리는 사랑

   관객들을 애타게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존은 앨머의 제자인 넬리와 결혼하고, 앨머 또한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알리며 이야기가 끝나죠.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그 사랑을 반대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앨머는 후반부에 존에게 찾아가 자신의 사랑을 뒤늦게 고백하며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존에게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하죠. 앨머는 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앨머]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이었던 적이 없었어요. 제가 당신에게 천사 석상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읽어보라고 한 그 때 전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전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기나긴 오후들을 기억해요. (...) 전 평생 당신 옆집에 살았어요. 전 당신의 자립성, 당신의 힘을 이젠 당신이 저에게—왜 그것이 우리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말해주길 바래요, 왜 제가 실패했죠? 왜 당신은 거의 충분히 가까이 왔었는데—더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은 거죠? (2막 11장, p267)

   앨머는 존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넬리와 약혼한 존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준 앨머의 제자 넬리에게 끌렸고, 넬리와의 사랑을 택한 것이었죠. 하지만 존이 앨머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존은 사랑을 갈구하는 앨머에게 이렇게 말하죠.

[존] (억지로 말을 하며) 나는 진실을 존중해요,  그리고 당신을 존중하구요—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앨머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서 당신이 이겼어요.
[앨머] 무슨—논쟁요?
[존] 해부도에 대한 논쟁요.
[앨머] 아—해부도! (2막 11장, p263)

   존은 앨머와의 만남 이후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앨머에 비해 고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결국 앨머와의 사랑을 단념하죠. 둘의 새드엔딩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 인해 삶이 변화해버렸으면서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니까요.

   앨머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존의 적극적인 사랑을 보며 자신의 가슴 속에 있던 사랑에 대한 열정과 욕망을 깨닫게 되고, 사랑의 감정이 뭔지 처음으로 알게 되죠. 누군가는 이러한 앨머의 변화를 ‘타락’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체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은 없기에, 앨머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는 몰랐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성장’한 것이 아닐까요?

   두 사람의 엇갈림이 가슴아픈 이유는 그것이 두 사람의 자발적 선택이 아닌,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앨머는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영혼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물려받았습니다. 존은 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을 뿐더러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시신을 눈 앞에서 목격하며 ‘생명력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폭발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희곡으로 직접 만나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 작품에서 존과 앨머의 논쟁은 단순히 사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에 대한 논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어 온 논쟁이죠. 사랑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갈등인 것입니다. 70년이 넘은 이 작품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그 안에 인류가 지속해온 고민들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그가 훌륭한 작가인 것이겠죠.


>> ②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starbook1999/29


▷ 도서 정보

테네시 윌리엄즈(김기애 역). 2002. 여름과 연기. 도서출판 동인

http://aladin.kr/p/AFr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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