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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Mar 11. 2022

이뤄지지 못해 더 아름다운
한여름의 로맨스 ②

테네시 윌리엄즈, <여름과 연기>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tarbook1999/28


매력적인 인물 창조의 귀재, 테네시 윌리엄즈

   <여름과 연기>는 테네시 윌리엄즈가 쓴 희곡입니다. 그는 미국의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요, 당대 미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인기 극작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학들이 입시 희곡과 졸업 작품으로 윌리엄즈의 작품을 선택하죠. 무엇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로맨스물의 흥행에 있어 주인공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주인공이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따라 독자들은 두 사람의 사랑에 깊게 몰입합니다. 얼마나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그려지느냐가 관건이죠.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즈는 매력적인 인물 창조의 귀재였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사랑이야기가 재미있는 것도 인물이 가진 매력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공연에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공연팀의 몫입니다. 많은 극작가들은 연출가나 제작진들의 몫으로 남겨두죠. 하지만 테네시 윌리엄즈는 마치 소설처럼 구체적으로 주인공을 묘사합니다. 자신의 생각한 주인공의 형상을 다른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를 테면, 극 초반에 작가가 묘사하는 어린 시절의 앨머와 현재의 존은 아래와 같습니다.

10세의 소녀 앨머가 무대에 등장한다. 그녀는 세일러복형의 블라우스를 입고 땋은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다. 그녀에겐 이미 어른스러움이 나타난다. 그녀에겐 특별한 섬세함과 부드러움 또는 영성(靈性)이 나타나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분명 달라 보인다. 앨머는 마치 성찬식에서 성체용 빵을 받을 때처럼 한 손으로 다른 손을 포개어 두 손을 잡는 습관이 있다. 그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 습관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서막, p29)
존 뷰캐넌이 다가온다. 그는 정체된 사회에서 활발하고 들떠있는 생동감이 넘쳐나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인물이다. 그의 넘치는 힘은 아직 그 경로를 찾지 못했다. 만약 경로를 찾지 못한다면 그 힘이 그를 소진시킬 것이다. 현재 그에게는 미칠 듯한 그의 불안을 덜어 줄 방탕의 낙인이 찍혀있지 않다. 그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신선하고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1막 1장, p45)

   두 사람의 매력적인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지지 않나요? 단순히 키나 생김새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동감이 넘쳐나는’, ‘섬세함과 부드러움 또는 영성’과 같이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다채로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물을 더욱 생생하게 상상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통해 읽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로맨스에 더욱 ‘과몰입’할 수 있죠. 이러한 묘사는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에서는 한 때 잘나가던 운동선수 출신의 주인공 브릭을 이렇게 묘사하죠.

브릭은 욕실 문가에 서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다. 한쪽 발목이 부러져서 깁스로 고정한 상태라 수건걸이에 의지해 있다. 소년처럼 몸이 날씬하고 단단하다. 아직 그의 외모가 술로 인해 망가지기 시작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매력은 싸움을 포기한 자가 갖는 서늘한 초월의 분위기이다. (1막, 민음사 본 p20)

   테네시 윌리엄즈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욕망’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 이전에는 욕망을 감추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악역의 몫이었죠. 하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들에게도 대사를 통해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마음을 감추는 것보다 인물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 그 인물에게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인물들의 솔직한 감정표현은 독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는데요, 이것이 테네시 윌리엄즈 희곡이 가진 매력입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무대

   <여름과 연기>에서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무대입니다. 이 작품에서 무대는 단순히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죠.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읽어보면,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자신이 구상한 작품 속 공간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자신이 머릿속에 생각한 무대디자인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어놓았죠. 예를 들면, 앨머의 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문과 창문은 고딕식 디자인의 정교한 뼈대로 표시되어 있다. 그 뼈대에는 초록색과 호박색 잎사귀의 담쟁이 덩굴이 붙어있다. (...) 목사사택의 소파 뒤에는 낭만적인 풍경화가 들어있는 금박 입힌 액자가 걸려있는 벽의 일부가 있다. (p18)

   어때요? 집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나요? 사실 이건 이 작품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중반에는 이렇게 극도로 사실적인 방식의 희곡 서술 방식이 유행했습니다. 작가마다 주안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다르지만, 그 중에서도 테네시 윌리엄스는 무대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죠.

    이 작품에서도 무대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특히나 주목할 부분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낮 장면 동안의 하늘은 순수하고 강렬한 푸른색(르네상스 시기의 종교화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하늘처럼)을 띄고 있어야하고, 등장인물의 의상은 배경이 되는 그 강렬한 푸른색과 극적 대조를 이루는 색깔이어야 한다(색깔의 조화와 다른 시각적 효과는 아주 중요하다). (p17)

   첫 번째는 하늘입니다. 작가는 하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내에서 벌어지는 장면에서도 벽 대신 하늘이 보여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미국 남부의 여름은 덥고 햇살이 뜨겁기로 유명한데, 이러한 하늘의 모습을 통해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죠. 모든 문장을 하이틴 소설처럼 만들어준다는 마법의 문장, ‘여름이었다.’처럼 말이죠.

그곳에는 돌로 만든 천사 모양의 분수대가 위치해 있는데, 그 천사는 우아하게 웅크린 자세로 날개를 쭉 펴고 두 손을 컵 모양으로 맞잡고 있어서, 그 손에서 사람들이 마시는 물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그 분수대의 천사 석상(石像)은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작품의 진행과정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상징적인 인물(영원)로 실내 장면의 뒷 배경에 잘 돋보이게 한다. (pp18-19.)

   두 번째는 천사 석상입니다. 천사는 영혼을 중시하는 앨머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앨머가 새로운 사랑에 눈을 떴을 때에도 “천사 석상을 마주하고서 장갑 낀 손을 들어올려 일종의 고별 경례”를 하죠. 두 사람의 사랑이 떠난 뒤에도, 천사 석상은 그 이름처럼 ‘영원’히 남아 자리를 지킵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도 남는다는 영원과 영혼의 의미를 보여주듯 말이죠.

[존] 여기 있어요!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어요. (그가 그녀의 몸을 돌린다.) 이 해부도를 봐요! (...) (미친 듯이 이를 들어내며 격렬하게) 자, 이제 해부학 강의를 들어봐요! 이 머리 속의 뇌는 진리라는 것에 굶주려 있지만 얻는 것은 별로 없고 계속 굶주린 상태에 있어요! (...) 앨머: 그래요, 해부도에 그게 빠져있어요. 그러나 영혼은 거기에 있다구요, 그래도, 거기 있어요! 어딘 가에 보이진 않지만, 그러나 거기 있다구요. (2막 8장, p216-217)

   세 번째는 해부도입니다. 존의 의사 사무실에 붙어 있는 해부도는 천사 석상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천사 석상이 영혼을 중시하는 앨머의 연애관을 보여준다면, 육체를 상징하는 해부도는 존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특히나 ‘영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끝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사랑만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암시해주죠.

   무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다보면 작품의 구조를 파악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공간을 상상하며 읽다보면 이야기에 몰입하기도 훨씬 쉬워지구요. 아마도 희곡을 읽어나갈 때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만나듯 생생하게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만큼 사람의 마음은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이렇게나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랑에서 많은 행복과 기쁨을 얻지만 슬픔과 아픔도 겪게 됩니다. <여름과 연기> 속 앨머와 존처럼 말이죠.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고 아름답고 능숙한 사랑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 ‘연습’일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어떠한 일에 더 잘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 그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연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더 나은 사랑을 위해 어떻게 연습을 해야할까요?

   희곡의 힘은 바로 여기서 발휘됩니다. 희곡은 사랑 이야기를 대화의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순간들을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런 마음을 어떤 말로 전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희곡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올 때마다, 우리는 연습 없이 그 순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희곡은 그 연습을 우리 대신 도와줍니다.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이 너무 어렵다고 느껴질 때, 인생과 인간관계의 길라잡이인 희곡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희곡을 통해 연습한다면 막막하다고 생각했던 상황들도 너무나 간단하게 풀리게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이 작품을 읽게 될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조언을 한다면, 두 사람의 시선을 각각 따라가보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존과 앨머,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주로 앨머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대부분 앨머이고 존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죠. 마지막 장면 또한 존보다 앨머의 변화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원작 그대로 앨머의 관점을 따라가며 읽어봐도 재미있겠지만, 상대방인 존의 입장으로도 작품을 한번 더 따라가본다면 <여름과 연기>를 읽는 재미도 두 배가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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