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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Jun 05. 2022

만화 대여점의 추억

취향을 만드는 우연성의 미학

    내가 코난을 처음 만난 곳은 동네 만화 대여점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만화 대여점은 한때 컨텐츠 산업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었고,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만 해도 3개의 대여점이 있었다. 만화책은 물론 라이트노벨과 최신영화 테이프와 DVD까지, 그 당시에 핫하다는 작품을 만나려면 대여점을 찾곤 했다. 비록 나의 어린시절도 대여점의 최전성기는 아니었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전환기에 성장한 나는 대여점 문화의 끝자락을 함께할 수 있었다.

    당시의 대여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부담없이 영화나 만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 말고도 적지 않은 친구들이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변에 만화가를 꿈꾼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대여점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친구들이 모두 만화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성장한 이들이 최근 뉴미디어 시장의 적극적인 생산자로써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여점 문화는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OTT의 선두주자인 넷플릭스도 대여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추측이 무리는 아니다.


    대여점에서 처음 접한 작품이 <명탐정 코난>이었던 건 아니다. 처음엔 어린이를 위한 학습만화 코너를 서성거리며 책을 들춰보기만 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같은 살아남기 시리즈나 <이라크에서 보물찾기> 같은 보물찾기 시리즈, 요즘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Why?>시리즈는 물론, 지금은 사라지고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학습만화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학습만화가 재미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지만, 내가 볼 수 있는 만화는 학습만화뿐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나 스스로에게도 만화를 즐기는 어린이의 모습은 ‘바람직한 어린이’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왠지 다른 만화를 보면 어른들한테 혼이 날 것 같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 나에게 학습만화는 ‘바람직한 어린이’상과 만화의 즐거움 사이의 타협점을 통해 자기 합리화의 여지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나의 즐거움을 충족시키엔 학습만화의 수가 충분치 않았다. 일부 초등학생들을 제외하면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신간이 제때 업데이트 되지도 않았다. 재미있는 책들은 여러 번 돌려보기도 했지만, 나중엔 몇 페이지에 무슨 대사가 나오는지 외울 정도로 지겹게 느껴졌다. 게다가 너무도 교육적인 방향성을 추구한 나머지, 학습만화는 대부분 비슷비슷한 스토리 전개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책을 읽어도 설명하고 있는 학습내용만 다를 뿐 스토리와 등장인물은 똑같았다. 마치 하나의 틀에 맞춘 똑같은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어린 시절 나의 첫 일탈이 시작된다.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학습만화 서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다른 만화들을 향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나아갔다. 처음엔 남들이 볼까 두려워 슬쩍 지나가는 시늉을 하며 제목을 훑었고, 조금 더 용기가 생긴 뒤로는 한 두권씩 꺼내어 책장을 들춰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소년만화’였다. 다른 로맨스만화나 무협만화들은 길쭉길쭉하거나 눈이 커다랗고, 혹은 몸이 우락부락한 사람들만 등장해 어린 나의 눈에는 재미있기보다는 무서워 보였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귀엽고 키작은 아기자기한 캐릭터들과는 천지차이였기 때문이다.

    소년만화는 어린이 만화와 다른 만화들 사이에서 느끼던 당혹스러움 사이에서 타협된 그림체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등장해서 다른 학습만화들과 비슷하지만, 귀여움 대신 멋짐이 탑재되어 왠지 어른의 세계를 엿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여점에서 이 만화를 대여하던 사람들은 어린 나에게는 무척 어른 같아보였던 중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도 이 만화를 읽으면 그런 중고등학생 형누나들처럼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란 환상도 조금은 가졌던 것 같다. 그 후 대여점에서 읽기 시작한 소년만화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고, 학습만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만화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소년만화의 대표주자인 <명탐정 코난> 또한 이 시기부터 내 인생에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별 거 아닌 사건인데, 당시의 나에겐 엄청나게 큰 사건이자 일탈이었다. 어린이용으로 구성된 세계,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며 동화나 동요만을 부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교육받았던 나에게 어린이용이 아닌 소년만화나 성인독자를 위한 만화는 완전히 금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금단을 스스로 넘어버렸다는 생각은 엄청난 죄책감과 그걸 뛰어넘는 희열이 공존하는 행위였다. 겁이 많은 편이라 어른들이 정해놓은 선을 잘 지켜왔던 나에겐 특히나 그 짜릿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러한 나의 경험은 취향을 만드는 데에 있어 우연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만화 대여점을 갔고, 그 대여점의 학습만화 서가 근처에 소년만화 서가가 있으며, 그 소년만화에 코난이 있었다는 상황들이 겹쳐서 비로소 <명탐정 코난>을 애독하는 나의 취향이 완성된 것이다. 만약 내가 대여점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그 대여점에 학습만화와 소년만화 코너의 거리가 서로 멀었더라면, 그 소년만화 코너에 코난이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명탐정 코난>이라는 취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온라인 상에서 활성화되는 컨텐츠시장은 이런 우연성을 최소화하고 이용자에게 ‘적합한’ 컨텐츠를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이 지배하고 있다. 더 체계적이고 정제된 시스템을 위해 수없이 많은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밤낮없이 매달린다. 그들은 우연성의 요소는 최대한 배제한 채, 그들이 만들어낸 알고리즘 속에서 모든 컨텐츠들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이 정교해지면 정교해질수록 소비자는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알고리즘에서 외면하고, 소비자 스스로도 알고리즘의 본질을 그다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여점과 같은 오프라인 공간은 이런 체계성과는 거리가 멀다. 장르나 큐레이션 같은 나름의 분류체계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온라인 상의 알고리즘들이 추구하는 정교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체계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게 마련이고 그 빈틈에서 우연성이 만들어진다. 너무도 견고해 소비자가 끼어들 수 없는 알고리즘과 달리, 우연성의 빈틈에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 같은 소비자들은 그 공간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며 끊임없는 우연의 순간을 마주한다. 평소 인터넷에서는 화면 상에서 목격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내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리고 그것들이 내 기억 속에 박히는 순간들 말이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들은 켜켜이 쌓여올라가 취향으로 완성된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제시한다면, 오프라인 공간의 우연성은 취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알고리즘은 좋은 기술이다. 재미있는 컨텐츠가 끝도 없이 쏟아져 그것들을 탐색할 시간조차 부족한 우리에게 컨텐츠를 찾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을 줄여주고 나의 취향을 기가 막히게 찾아주니까. 하지만 알고리즘의 늪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알고리즘 밖의 세상에 점점 소홀해진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의 편안함에 파묻히고 취향은 점점 누군가가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무한히 회전할 뿐이다.

    알고리즘을 벗어나 거대한 컨텐츠의 바다에 표류하는 것은 두렵고 고독한 일이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알고리즘 속에서만 맴도는 것은 우리의 세상을 넓히지 못한다. 알고리즘 밖에서의 새로움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을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는 취향이라는 보상이자 결실을 얻게 된다.

    때로는 알고리즘의 늪에서 벗어나 우연성의 바다에 몸을 맡겨보자.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때의 짜릿한 설렘이 당신의 인생을 뒤흔들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설렘은 새로운 취향이 되어 우리 인생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마치 수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나와 <명탐정 코난>의 만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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