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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Mar 22. 2022

미래소년, 아니면 명탐정

코난을 사이에 둔 세대 차이, 그리고 거장의 조건

    60년대생 우리 엄마는 내가 코난 이야기를 하면 머릿속에 미래소년 코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명탐정 코난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엄마에게 코난은 미래소년 코난이다. 미래소년 코난이라니, 정말 충격이었다. 나에게 '코난'은 언제나 명탐정 코난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셜록 홈즈의 작가가 '코난 도일'이라는 사실도 명탐정 코난 시리즈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만큼 코난이라고 하면 원 앤 온리, 명탐정 코난뿐이었다.

    사실 '코난'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명탐정 코난을 떠올릴 줄 알았다. 내 주변 친구들도 코난이라고 하면 대부분 명탐정 코난을 가장 먼저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중학교 때 유튜브를 통해서였다. 요즘은 저작권 때문에 거의 안 올라오지만 유튜브 초창기였던 당시에는 코난 풀 영상을 검색해볼 수 있었다. 이때, 검색창에 '코난'을 검색하면, 내가 원하는 명탐정 코난은 안 나오고 미국의 방송인 코난 오브라이언과 관련된 컨텐츠만 검색이 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코난'이라는 검색어 대신 '명탐정 코난'이라는 풀네임을 넣어야 했던 귀찮은 기억도 있다.


    나도 미래소년 코난을 모르지는 않는다. 사실 무슨 스토리인지는 잘 모르지만 "달려라 코난, 미래소년 코난, 우리들의 코난"이라는 주제가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봤다. 미래소년 코난을 안다고 하면 어른들은 '니가 어떻게 미래소년 코난을 알아'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내가 미래소년 코난을 알고 있던 이유는 내가 아침형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지금은 절대 아니다) 아침형 인간이었던 나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너무 심심하면 애국가가 나오는 그 시점-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지상파는 24시간 방송을 내보내지 않으며 매일의 방송은 화면조정과 애국가 영상으로 시작한다-부터 TV를 보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리고 시청률이 낮은 이 시간대에, 대부분의 채널은 다큐나 뉴스를 내보내는데 EBS에서는 <꼬마 자동차 붕붕>이나 <플랜더스의 개> 같은 옛날 애니메이션을 송출했다. 볼 프로그램이 그것밖에 없었고, 아주 간헐적으로 미래소년 코난을 시청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내가 그 시간대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야기할 때면, 엄마와 아빠는 정말 반가워했다. 6-70년대 애니메이션을 통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TV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 내용을 아침식사 때 이야기하면 그날 밥상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로 넘어가곤 했다. 특히, 나이 차이가 8살이신 부모님의 서로 다른 어린 시절을 듣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8살 많은 아빠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엄마에게 공감을 원하면, 미묘하게 세대가 다른 엄마는 '난 어릴 때 아니었는데'라고 선을 그었다. 이런 티키타카는 부모님의 대화에서 가장 큰 웃음 포인트 중 하나였다.


    미래소년 코난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웃집 토토로>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녀 배달부 키키>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이후 작품들과는 다른 초기 작품의 매력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지브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천공의 성 라퓨타> 속 주인공 파즈와 시타가 <미래소년 코난>의 코난과 나나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미래소년 코난>을 하나의 프리퀄로 보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앞으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만들어갈 거장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이 작품은 6-70년대 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30년도 더 지난 21세기에도 재방영되었다는 것만으로 <미래소년 코난>이 가진 저력을 알 만하다.

    그런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말 대단하다. 나와 엄마는 30년 넘는 차이가 나는데 두 사람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랐다. 심지어 소수의 취향이 아닌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다수의 취향이었다. 엄마 세대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와 같은 90년대생들도 지브리의 작품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루 밑 아리에티>나 <벼랑 위의 포뇨>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 작품들은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여전한 인기를 보여준다. 넷플릭스에 그의 전작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SNS가 들썩들썩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대를 불문하고 대중들이 얼마나 지브리를 사랑하는지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성공한 예술가와 거장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마도 둘 사이의 간극은 한 끗 차이일 텐데, 우리가 그걸 나눌 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 불린다.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사람이고, 또 그 안에서 (혹자는 에코페미니즘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자신의 자연주의 철학을 뚜렷하게 표현한다.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제작사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작품성은 물론 대중성까지 갖췄다는 점이 아마 그가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반면,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소를 거장으로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물론, 만화 작가인 아오야마 고소-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애니메이션은 감독이 따로 있다-와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동일선 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에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과연 '예술성'이나 '철학'만이 이들을 가르는 차이였을까? 아니면 장르물이라는 세계가 가지는 한계였을까? 대충 이런 것이리라 하는 추측은 난무하지만, 뭔가 명쾌하게 떠오르는 답이 없는 것 같아 더 궁금해진다.


    사실 나 또한 아오야마 고소를 거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를 '성실한 노동자'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일을 장기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보다 일을 멈추지 않는 지구력이 훨씬 중요하다. 마스터피스는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컨텐츠를 매주 만들어내야 하니까. 마치 한 직장을 2-30년 다니는 것처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재를 이어오며 그가 보여준 것은 어떤 창의성과 예술성보다 꾸준한 성실함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아오야마 고소 혼자만의 작업도 아니고 자기모순적인 캐릭터 붕괴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가진 성실함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아오야마 고소에겐 '거장'보다 '장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거장'은 노력만큼이나 타고난 천재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인'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타고난 것들을 이길 수 있다. 거장은 태어나지만, 장인은 시간과 노력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때로는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거장보다 가늘고 길게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장인이 더 많인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재능이 없어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좌절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거장 대신 장인이 되자고. 불타오르는 거장 대신 가늘고 길게 사랑받는 성실한 노동자, 장인이 되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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