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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Sep 11. 2022

조력자가 있기에

추리소설은 탐정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추리소설 속 탐정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한량같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번뜩이는 추리력을 발휘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탐정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주변에서 만날 법한 일상적인 인물이 얼떨결에 탐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소설에선 철학적이고 과묵한 탐정이 추리를 이끌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길 좋아하는 수다쟁이 탐정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탐정의 유형은 인류가 만들어낸 추리소설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추리소설의 대표격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홈즈, 그 중에서도 '개인기가 뛰어난' 탐정으로 평가받는다. '탈인간'급 지능과 한번 알게 된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분야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지식까지. 그야말로 '사기캐'다.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감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오로지 이성으로만 사고한다는 점이 탐정에겐 오히려 플러스 요소로 작용한다.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초인적인 역량을 발휘해 해결하는 셜록 홈즈의 완벽한 '섹시함'은 그를 세계 최고의 인기 탐정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인기가 단지 그의 능력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점은 셜록 홈즈의 열혈 팬, 셜로키언(Sherlokian)들도 동의할 것이다. 물론 그가 비상한 머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파트너이자 조력자인 존 왓슨이 없었다면 셜록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했으리라.

    존 왓슨은 조력자이기도 하면서 시리즈의 서술자 역할을 한다. 셜록 홈즈의 사건들은 모두 그의 설명으로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홈즈를 탄생시킨 작가 코난 도일은 왓슨이라는 캐릭터를 빌려 자신의 자아를 작품 속 곳곳에 배치한다. 왓슨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작가의 마음을 투영한다는 분석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BBC 드라마 <셜록>에서는 왓슨을 셜록 홈즈의 소식을 전하는 '파워 블로거'로 설정한 바 있다.

    천재적인 홈즈에 비해 왓슨은 평범한 인물이다. 의사로써의 지식을 갖고 있지만 홈즈처럼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뛰어난 피지컬을 지닌 셜록 홈즈와 달리, 오히려 전쟁 중 부상으로 인해 다리를 절뚝거리기도 한다. 셜록 홈즈는 이런 왓슨을 신뢰하고 좋아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추리에 방해만 된다며 귀찮아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왓슨이 셜록 홈즈의 능력에 묻어가며 함께 인기를 얻은 듯 보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셜록은 알고 있을까? 때때로 자신의 추리를 방해한다며 귀찮아하는 조력자가 실은 자신을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홈즈와 같은 천재들은 추리력 측면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줄지 몰라도 타인과의 소통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오히려 자신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할 따름이다. 그의 잘난 척과 날카로운 태도는 주변인들로 하여금 쉽게 미움을 사게 만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셜록에게 사건을 의뢰하며 그에게 열광한다. 물론 셜록의 출증한 능력 덕분이겠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왓슨의 존재다. 갈등의 불씨가 생길 때마다 특유의 유들유들함을 발휘해 홈즈와 주변 사람들을 중재하는 그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셜록을 런던 최고의, 나아가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코난 도일이 왓슨을 서술자로 채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인 지능을 가진, 우리같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천재 소시오패스의 잘난 척만으로 소설을 가득 채웠다면 과연 이 시리즈가 그토록 재미있었을까? 독자들은 그의 매력에 빠지기보단 재수없다며 싫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왓슨이라는 캐릭터가 그 사이의 완충장치 역할을 해주었기에 독자들은 셜록 홈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명탐정 코난>의 코난(혹은 남도일)도 홈즈처럼 개인기가 뛰어난 스타일에 속한다. 이름에서부터 홈즈의 저자 코난 도일을 오마주로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코난은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인 아버지와 스크린을 주름잡은 배우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지성과 연기력, 외모까지 모두 겸비했다. 뼛속까지 셜로키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믿는 그 재수없음마저도 닮아있다. 모든 이야기가 코난의 입장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그렇지, 고등학생 탐정 남도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18살이 세상 진리를 통달한 듯 추리하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봤다면 극강의 얄미움을 느꼈을 거다.

    이런 코난도 셜록 홈즈처럼 모든 추리가 자신의 유능함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쪽이다. 무능한 탐정 유명한을 '잠자는 명탐정'으로 만들어 그가 일약 스타덤에 등극한 것도, 경찰이 풀지 못한 미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출중한 능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박사님, 모든 주변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움을 주는 조연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관종 기질까지 다분하다. 그의 이런 진심은 자신과 비등비등한 실력을 가진 '명탐정'들이 나타날 때 더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라이벌 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도 결국은 주변에 있는 조력자들 덕에 빛이 나는 법이다. 코난 시리즈에 왓슨처럼 고정적인 조력자 역할을 담당하는 캐릭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각 사건이나 에피소드마다 여러 캐릭터들이 그에게 도움을 주며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건, 단연 브라운 박사님과 홍장미(혹은 안시호)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과학자인 브라운 박사는 수많은 발명품을 선사하며 어린 아이가 된 코난이 탐정으로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 코난의 시그니처가 된 시계형 마취총과 나비넥타이형 목소리 변조기, 허리띠와 무전기 뱃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이것 말고도 극장판에서는 매 시즌마다 기상천외한 발명품을 선보인다. 극 초반에서 코난은 '뭐 이런 걸 만드냐'며 한심해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발명품이 코난을 위기에서 구하곤 한다.

    홍장미는 브라운 박사의 조수 겸 공동 연구원이자 브레인 역할을 맡고 있다. 코난을 작아지게 만든 검은 조직의 과학자 출신인데, 본인 또한 같은 약을 먹고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그는 코난을 실험대상으로 관찰하면서도 사건 해결에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코난이 남도일로 잠시나마 커져야 하는 상황에 그가 만든 해독제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코난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누구보다 콧대가 높은 코난도 홍장미 앞에서는 낮은 자세로 비굴해지곤 한다.

    유명한 탐정 또한 그의 조력자다. 극 중 사람들은 명탐정 유명한과 그 탐정이 조수로 데리고 다니는 꼬맹이정도로 생각하지만, 독자들은 알고 있다. 사실은 그와 반대라는 것을. 코난은 유명한의 이러한 무능함이 오히려 자신의 추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그가 자신의 조력자임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코난이 어린 아이의 몸으로도 자신의 추리를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명한의 명성과 권위를 빌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명성과 권위도 코난이 만들어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밖에도 엄청난 무술 실력과 따뜻한 마음으로 위기에 처한 코난을 구출하는 유미란, 코난과 홍장미의 같은반 친구들로 구성된 소년탐정단 멤버들, 코난이 마주하는 사건 대부분의 현장에 출동하는 골롬보 반장과 그 휘하의 형사들까지. 코난은 자신이 이들을 도와주며 추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지만, 과연 그가 이들이 없다면 제대로 된 사건 해결을 할 수 있을지 되묻고 싶어진다.


    그래도, 몸이 작아진 이후의 코난은 조금씩 조력자들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듯 하다. 고등학생 시절 남도일은 자신이 최고의 탐정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물론 그것을 자신의 추리실력으로 증명해보이지만, 의욕과 열정이 앞선 나머지 선을 넘기 일쑤다. 이를 테면, 사건 현장에서 책임자인 반장이 옆에 버젓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형사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점잖은 성격의 경찰청 골롬보 반장도 그의 무례함에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원래도 자존감이 넘쳐 흐르는 타입인데, 여기에 대중의 관심까지 더해지니 주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생 코난에겐 추리 실력만 남았을 뿐, 대중의 관심과 주변인의 신뢰는 사라진다. 어떤 말을 해도 '꼬맹이가 한 철없는 소리'로 넘어간다. 거칠 것 없던 그의 추리는 처음으로 장애물을 마주하고, 좌절하던 그는 조력자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독단적인 탐정의 자세를 아주 조금이지만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모종의 음모로 어린이가 되어버렸지만, 어찌보면 탐정으로써의 태도를 기르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코난이 다시 고등학생 남도일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극 중 인물들은 단 한 살도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점에서, 코난은 8살 어린이인 상태로 작품이 완결을 맺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만약에 코난이 다시 고등학생 탐정으로 성장한다면,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 전국을 누비는 명탐정으로 활약하게 된다면, 어린 시절로 회귀했던 경험은 더 뛰어난 탐정으로 성장하는 데에 분명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확신한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에게도 부족함이 있었으며, 그 부족함을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추리도 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이 분명 그를 더 나은 탐정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공정' 담론이 가장 큰 화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가려진,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에 가깝다. 내가 이룬 모든 성취는 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 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나의 능력을 의심하는 존재들로 여겨진다. 소수자의 핸디캡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연대와 협력구호는 능력주의를 방해하는 '불공정'의 잣대로 재단된다. 분명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사회 속의 자신이 가진 맥락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성과를 독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홈즈와 코난을 비롯해 그들과 함께하는 조력자들에서 볼 수 있듯,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이유는, 주변에서 그 능력을 함께 갈고 닦아주며 시너지를 이끌어주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것이라 생각한 그 능력은, 어쩌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능력일지 모른다. 주변의 다른 재능과 합쳐졌기에 비로소 빛을 발한 것일 수도 있다. 세기의 천재 탐정, 홈즈마저 조력자를 필요로 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우린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 존재이자,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존재를 빛내주는 조력자다. 서로가 서로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세상이 되어야 우리 모두의 능력이 빛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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