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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Sep 19. 2022

뻔뻔해도 괜찮아

당당하게 살자, 훗카이도를 강원도라 말하는 코난 더빙판처럼

※스포주의※
이 글은 극장판 8기 "은빛 날개의 마술사"와 극장판 13기"칠흑의 추적자"에 대한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난의 애니메이션버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자막파와 더빙파. 코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 애니메이션 팬층이 이렇게 나뉠텐데, 같은 팬이어도 이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만 애니메이션을 소비한다.

    자막파는 일본어 음성이 있는 원작에 자막만 얹어진 버전을 보거나, 오랜 덕질을 통해 쌓인 출중한 일본어 실력으로 자막 없이 보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자막판을 중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보통은 한국의 더빙판이 소개되기 전에 빠르게 보기 위함이거나 더빙이 원작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더빙판은 국내 방송사나 제작사의 취사선택에 의해 에피소드에 따라 수입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더빙버전이 존재하지 않는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후에 더빙판이 한국에 도입된 이후에도 더빙버전을 보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들은 오로지, 원작에 가까운 버전을 지향한다.

    더빙파는 한국의 방송사(투니버스나 기타 제작사들)의 더빙 및 번안작업이 완료된 버전을 더 선호하는 이들이다. 더빙작업이 이루어지는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시간을 감내한다. 차마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해 자막버전을 보았다 할지라도, 이후 더빙판을 다시 보기도 한다. 더빙판의 장점은 무엇보다 한국말로 되어 있어 보기가 편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코난의 경우, 등장인물의 이름도 모두 한국식으로 바꾸고 줄거리나 설정들도 한국에 적합하게 로컬라이제이션을 하기 때문에 자막판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스토리를 접할 수 있다. 같은 영상소스로 만들었지만 서로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로컬라이제이션이 상당한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한번 더빙판에 빠진 사람이 더빙판만 보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두 가지 중 무엇을 봐도 상관이 없겠지만, 혹시나 자막판과 더빙판을 혼용해서 보게 된다면 각각의 인물 이름이나 세계관, 사건 정보 등이 상이해 적지 않은 혼돈을 겪게 될 지 모른다.


    둘 중에 고르자면, 나는 더빙파에 속한다. 내가 더빙버전을 더 선호하는 이유에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라디오처럼 듣기 좋다는 점이다. 사실 코난의 왠만한 에피소드들은 돌려볼 만큼 돌려봤기에, 뭔가 신선한 재미를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몇몇 에피소드의 경우 너무 많이 반복재생해서 영상을 트는 순간 대략적인 영상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코난이 가끔 끌리지만 본격적으로 볼 만한 집중력이 있지는 않을때면 한 쪽에 영상으로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더빙판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 일본어라고는 인사말이나 길묻기 정도의 관광일본어 수준에 그친 나에게 더빙판은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딴짓을 하기 정말 좋은 콘텐츠다. 때때로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내가 기억하는 영상을 상상하다보면 익숙하고 권태롭게 느껴지던 에피소드들도 새로운 즐거움으로 다시 한번 소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더빙판의 '뻔뻔함'을 지켜보는 재미 때문이다. 더빙버전의 코난은 오랜 방영기간 동안 누적된 노하우 덕분일지 몰라도, 로컬라이제이션을 꽤 잘 하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일본어로 된 말장난과 농담들마저도 한국에 적합하게 바꿔낼 정도이고, 일본어로만 가능할 것 같은 한자 트릭들도 약간의 어거지는 있지만 어쨌든 사건에 맡게 그것을 풀어간다. 가끔 이 트릭을 위해 이름이 정말 어색해질 때도 있지만, 그정도는 덕후의 넓은 아량을 가지고 극적 허용으로 넘어가줄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가끔 무심코 튀어나오는 더빙판의 뻔뻔한 순간들은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게 큰 웃음을 준다. 로컬라이제이션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최선의 방도를 찾지 못해 누가봐도 일본의 이야기인데 한국의 이야기라고 우기는 식이다. 이런 뻔뻔함은 TV판보다 극장판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극장판의 경우, 단편적인 사건을 다루는 TV판보다 더 긴 호흡의 체계적인 서사를 가진다. 그만큼 범행트릭과 복선들도 정교하게 짜맞춰진다. 그러다보니, 일본어로 촘촘히 만들어진 이야기를 100% 한국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옥의 티 같은 순간을 대처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코난의 더빙판 제작사는 정면돌파를 택한다. 그냥 그대로 번역만 하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특히 극장판의 경우, 일본어로 된 간판이나 편지들도 CG를 통해 모두 한글로 바꿔놓는 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TV를 통해 방영되는 극장판이나 한참 후에 개봉되는 극장판의 경우 이런 작업 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채, 누가봐도 일본어인 문서를 읽으며 한국어 트릭을 발견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밖에도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강렬하게 지배하는 슈퍼 뻔뻔함의 순간들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극장판 8기, <은빛 날개의 마술사> 편이다. 이 영화의 경우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서 전개가 되는데, 후반부의 경우 강원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그리고 이 여정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는데, 악천후로 인해 비행기에 비상상황이 발생한다는 설정의 복선을 위해 강풍 예보로 가득한 강원도의 일기예보 화면이 비춰진다. (이런 악천후 속에서 비행기가 어떻게 떴냐, 고 물으신다면 그건 극적 허용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바로 여기서, 강원도의 일기예보를 설명하는 기상캐스터의 뒤로 버젓이 일본의 주요 4섬 중 최북단 훗카이도(北海島, 북해도)의 지도가 떠있다. 아마 일본판 원작에서는 훗카이도였으리라. 강풍 주의보가 심각한 일본의 가장 추운 지역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강원도가 된 듯하다. 어쨌거나 훗카이도의 지도를 보며 강원도의 일기예보를 소개하는 방송사고, 혹은 캐스터의 뻔뻔한 대처능력은 내가 손꼽는 코난의 웃음포인트 중 하나다.

    두 번째는 극장판 13기, <칠흑의 추적자> 편이다. 13기의 경우 스케일이 굉장히 큰 사건인데, 무려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다. 특히 이 연쇄 살인의 다음 장소를 예측해내는 코난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지도나 지명을 활용한 트릭과 실마리가 많이 등장하는 탓인지 이 편의 경우 한국어로 더빙을 입히긴 했지만 로컬라이제이션은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들이 내뱉는 대사는 한국어인 상황이다. 직접적으로 '일본'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고 '우리 나라'라는 식으로 뭉뜽그리긴 하지만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곳이 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로컬라이제이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한국버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은 한국인인데 지명은 일본인 이 오묘하고도 요상한 상황 속에서, 전국적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각 지역의 수사책임자가 모인 전체 회의 장면은 뻔뻔함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분명 일본 전역에서 모인 각 서(署)의 수사책임자들의 회의인데, 그곳에 참석한 반장들의 이름을 보면 모두 한국인이다. 일본 지역 경찰청의 요직을 모두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국뽕 아니겠는가. 물론 반어법으로 말이지만. 어쨌거나 이 생각을 한 번 하고나니, 경찰들이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힐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더빙판의 이런 뻔뻔함은 큰 웃음을 주었지만, 때로는 위로와 자신감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사실 나는 사과를 굉장히 자주 하는 편이었다. 내 실수나 잘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쨌든 내 잘못이 조금은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인정하고 쉬이 사과를 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내가 범한 실수의 정도보다 훨씬 과한 사과를 하기도 했다. 억울하진 않았다. 원래 세상살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민폐'라는 말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문화에서 성장한 만큼,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공연팀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팀에서 함께해주시는 교수님급 스태프분께 밤 12시도 넘은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고의는 아니었고, 다음날 오전에 맞춰 예약전송을 하려던 것이 실수로 즉시전송된 것이다. 물론 결례가 된 건 맞지만 무언가 중대한 해를 입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분께서 나를 나무란 것도 아니었다. 이후에 받은 답장을 보면 사실 별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기도 하다. 괜히 제 발을 저린 내가 문자로 장문의 사과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나를 보고 지인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도덕적으로 잘못한 게 아니면 그렇게 과하게 사과하지마. 그게 잘못도 아니고, 그렇게 사과하면  진짜 중요한 순간에 사과를 할 때 진심이 안 보여."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무도 사과를 원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먼저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과하게. 어쩌면 그분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못된 사람처럼 보이나'라고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자신을 멕이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만큼의 사과를 다른 이들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가 범한 실수에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뻔뻔한 일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지인의 말을 듣고 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진심을 다하는 사과를 위해서는 로는 뻔뻔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뻔뻔하다는 말도 나의 편견이 담긴 말이다. 사과를 남용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표현하는 자세, 그것은 뻔뻔한 게 아니라 당당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코난의 저 뻔뻔한 순간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그래, 저런 영화들도 저 정도 실수는 가볍게 넘어가고 관객들도 극적 허용으로 쉬이 수용하는데, 내 삶 속 작은 실수도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자고 말이다. 그런 여유로움이 생겨야 내 마음도 편해지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품어주는 나의 아량도 넓어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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