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외향인들의 유니버스
탐정에게 적합한 MBTI가 있을까?
대세라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정도로, MBTI가 트렌드 곳곳을 휩쓸고 있다. 어딜가나 MBTI를 마주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광고나 컨텐츠에서는 물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MBTI가 뭐냐는 질문을 듣곤 한다. 어쨌거나 자신의 심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니 반가운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과몰입과 왜곡이 심해져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MBTI를 들이대는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지만 말이다.
사실 MBTI 자체가 심리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지표이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사람을 고작 16개의 유형으로 구분하는 게 말이 되냐'며 불신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유형은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MBTI의 창시자인 브릭스와 마이어스 모녀에 대한 책 <성격을 팝니다>(비잉, 2020)에서 저자인 메르베 엠레는 "MBTI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곧 이를 도구로 써서 자아를 응시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라 주장하며 "성격 유형이라는 언어로 자기를 이해하는 기술은 개인의 소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개인을 해방시키는 힘도 있다"고 설명한다(pp19-20). 실제로 MBTI 기법의 탄생은 누군가의 꿈 속 욕망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도식화한 것에서 비롯되되었는데, 누군가의 심리유형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무의식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도구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제 실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MBTI를 분석하기에 이른다. 사실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이 심리학 혹은 연기술에서 아주 중요한 기법 중 하나이다. 어떤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가상의 인물을 필요로 하는데, 가상의 인물을 총체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이 문학이 걸어온 길이기 때문이다. MBTI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명탐정 코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도 MBTI 유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심리학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입장에서 함부로 속단할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코난 속 주요인물들의 MBTI는 99% 'E(외향형)'로 시작할 것이라는 점이다. 누가 봐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확신의 외향인이다. 나는 비록 'I(내향형)'인간이긴 해도 서로 대립하는 E와 I의 비율이 비등비등하고 사교성이 없지는 않은 편인데, 코난 속 인물들은 차원이 다르다. 왠만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파워 외향인들의 유니버스가 아닐 수 없다.
코난을 비롯한 인물들의 친화력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이 가진 극강의 외향성은 용의자를 포함한 사건 관계자들을 만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사건을 전후로 해서 고작 한두번 정도 만났을 뿐인데, 얼굴을 아는 사람이다 싶으면 바로 형, 누나, 언니, 오빠라 부른다. 이미 친해질 만큼 친해졌는지 서로 말을 놓기도 한다. 그들 사이에 깊은 의사소통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단지 같은 캠핑장에서 바로 옆 텐트를 쓰고 있다거나, 여행지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다. 나였다면 그냥 남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들에겐 이미 가까운 지인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양 그들에 대한 정보를 마구 쏟아낸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단짝이 따로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게다가 그들에게 너무 친밀감을 느낀 나머지 감정이입을 하며 알 수 없는 믿음을 보내기도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탐정의 자질이라 믿는 코난은 그나마 낫다. 하지만 코난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과 친한 그들은 선한 사람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코난과 형사들이 용의자들을 의심하며 취조할 때면, '이 언니/오빠/형/누나는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라며 편을 들기도 한다. 정말, 자신이 그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안다고 그러는 걸까 싶은 생각에 기가 차기도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평생을 함께 살아도 속마음은 알 수 없는게 사람이라는데, 도대체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이 선(善)할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번의 인연과 대화 속에서 우정을 넘외 신뢰까지 구축하는 소울메이트가 되어버리는 그들의 친화력이 놀라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옛말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놓고 쓰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을 사귀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나에겐 특히나 더욱 그러했다. 반면에 저런 마인드로 어떻게 추리를 이어가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을 저렇게 쉽게 믿으면 크게 다치는데, 라는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런 외향형 인간들에 둘러쌓인 세계에서 내가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들의 친화력은 너무도 강력한 나머지, 어떨 때는 상대방이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이미 친분을 쌓았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숙소에서 만난 생면부지 낯선 사람들과 자연스레 일정을 함께하게 되는데 과연 코난 일행과 함께하게 된 이들 모두가 낯선 이와의 여행을 즐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특히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거리가 중요한 나에겐 이런 친화력 넘치는 순간들이 선을 넘는 오지랖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악한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나의 기분마저 감내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내가 이들을 가상의 컨텐츠 세계에서만 보았기에 별 생각이 없지만, 실제 생활에서 만났다면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저런 '오지랖' 같은 자세야 말로 탐정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존재들에겐 특히나 더 그렇다. 탐정은 진실을 탐색하며 정의를 구현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러한 추리는 사건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라거나, 억울함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설움을 풀어주는 일로 이어진다. 즉 탐정이 따라가는 진실의 여정은 이런 이들을 돕는 일로 이어지는 셈이다. 물론, 셜록 홈즈라는 극히 예외적인 소시오패스적 성향의 천재들처럼 사건해결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탐정들은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돕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 나아가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외향형 인간으로 가득 찬 명탐정 코난의 세계가 어쩌면 탐정의 자질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쓸데 없는 오지랖이라 생각할 지 몰라도, 누군가의 생활 속 작은 징후를 놓치지 않고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진실을 따라가는 것. 이 과정이 결국 추리소설의 스토리텔링일 것이며, 우리가 추리를 읽으며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 추리를 통해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이 해소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오지랖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수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도, 외향형 인간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가족은 원래 그렇다'거나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거야'라는 식으로 쉽게 넘기는 문제들도 사려깊은 인간들의 세계에선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고난 사교성을 바탕으로 주변의 인물들에게 다가가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겪고 있던 아픔들을 끄집어내며 사건을 발견해낸다. 아무도 사건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문제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단순히 드러난 문제를 쫓아가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오지랖을 통해 문제부터 찾아내는 것. 탐정이 갖춰야 할 진정한 자질은 아마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MBTI 이야기로 돌아와서, 탐정은 반드시 외향형 인간이어야만 적성에 맞는 것일까? 타고난 사교성으로 오지랖을 부리며 주변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모든 원동력이 외향성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격 유형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코난 속 인물들이 사려깊은 사교성을 발휘할 수 있는 데에는 그들의 외향적 성향도 일부 반영되어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향적 성향과 큰 관련이 없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고 무심한 외향형 인간도 존재할 수 있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내향형 인간도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니 탐정에게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요구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MBTI 유형의 E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MBTI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와도 연결된다. 이른바 MBTI 과몰입러들은 '이래서 내가 E야'라거나 '내가 I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를 못한다', '나는 T라서 너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어', '너가 P라서 그렇게 게으른거야'라는 식으로 나를 합리화하고 타인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은 외향 내향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성향 차원의 문제다. 여기에 MBTI를 들이미는 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려깊지 못한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찾고 싶은 마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은 MBTI에 따라 인간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MBTI는 개인을 규격화하고 규정하는 도구이기 이전에 "개인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진 도구이다. MBTI의 목적은 자신을 타고난 성격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단점을 극복하고 더 큰 잠재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함이지, 그것으로 모든 행동을 설명하고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탐정에게 적합한 MBTI가 무엇이냐 따져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MBTI가 직업 적성과 관련한 부분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을 고려해보면, 또 하나의 직업인 탐정의 MBTI를 따져보는 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나는 탐정에게 중요한 것은 MBTI로 정의되는 외향(E)과 내향(I), 직관(N)과 감각(S), 사고(T)와 감정(F), 판단(J)과 인식(P)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마음, 그 사람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주겠다는 마음. 결국엔 이런 마음들이 모여 더 훌륭한 탐정을 탄생시키는 것이리라.
이것은 비단 탐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혹자는 MBTI에 자신을 밀어넣으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고 MBTI에 적합하다고 말하는 일만을 수행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MBTI는 절대 장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MBTI는 내 한계의 끝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MBTI보다 가장 굳건히 내 정신세계를 지키고 있는 나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심리유형 분류법도 누군가의 마음가짐을 이겨낼 순 없다. 심리테스트는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정의 내리는 불변의 진리가 될 수도 없다. 우리는 그저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심리 테스트를 통해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I인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J형 인간이 아니니까 난 이런 일 못하겠지라며 원하는 일을 스스로 좌절시켜왔던 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MBTI 속 성향이 아니다. MBTI 앞에서 일찍이 포기해버린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명탐정 코난의 유니버스가 사건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그곳이 파워 외향인들의 세계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려움을 풀어주고자 하는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덕분일 것이다.
코난의 친구들이 뛰어난 추리력 없이도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능력이나 MBTI의 도움 없이 마음으로 이뤄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된 것 같다. MBTI 과몰입러들이여, MBTI가 규정하는 문장들은 문장들은 잠시 잊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은 MBTI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