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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Oct 14. 2022

우울한 해피엔딩

범인이 잡혀도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착잡한가

    인터넷 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코난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는 바로 범인 검거 후 배경에 깔리는 어두운 음악이다. 누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우우우우~'라며 읊조리는 듯한 음악은 사건 말미에 범인이 검거되거나,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 순간에 활용된다. 참고로, 이 음악은 코난 오프닝에 활용되는 메인 테마를 우울하게 편곡한 버전이라 동일한 멜로디가 변주된 곡이다. 실제로 공식적인 음원명은 '메인테마 포크버전'으로 알려져있다. 가장 경쾌하고 열의에 찬 노래가 이토록 우울한 노래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게 여러모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범인이 검거되는 순간의 우울함은 음악뿐만 아니라 화면 연출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눈물의 참회를 하는 범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가 서서히 공간 전체를 비추는 풀샷으로 전환된다. 화면은 점점 멀어지며 사건을 감싸는 풍경 전체를 아련하게 보여주고 우울한 음악과 함께 조용히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엔딩의 우울함을 환기시키기 위해 짧지만 경쾌한 에필로그와 함께 에피소드가 마무리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범인이 검거되는 순간에 우울한 노래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미궁 속에 빠져버린 사건에서 탐정의 활약으로 범인이 검거되는 권선징악의 엔딩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은 분명 해피엔딩일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나 명확한 선악의 이분법을 통해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분하는 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태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범인이 밝혀지는 것은 범인과 코난의 두뇌싸움에서 결국 주인공인 코난이 승리했다는 뜻이고, 범인보다 코난에게 이입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이 작품에서는 해피엔딩 같아야 할 검거 순간을 왜 이토록 우울하고 어둡게 그린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것은 비단 코난 시리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을 묵직하면서도 어둡게 풀어낸다. 물론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스산한 분위기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끌어가야 하는 탓도 있으리라. 하지만 유쾌함이 가장 큰 매력인 이른바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 장르에서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서는 대개 진중한 공기가 감돌기 마련이다.

    현실에선 어떨까. 형사들이 범인을 검거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통쾌한 모습을 상상한다. 고통받던 피해자와 유족들의 원한이 조금은 해소되고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질서가 바로서는 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마치 이몽룡이나 어사 박문수가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며 범인들이 혼비백산하는 영화적인 모습을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순간이 그렇게 속시원 하기만 할까? 어쩌면 추리소설 속의 무거운 순간들이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속 시원해야 할 것만 같은 순간들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범인의 검거'보다 '진실의 규명'에 초점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얼핏보면 두 개는 매우 닮아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범인이 밝혀졌다고 하여 언제나 진실이 규명되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 밝혀지지 않아도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어떠한 범죄를 실행한 이른바 '꼬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붙잡혔다고 해서 그 범죄를 지휘한 '머리'가 반드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사건의 진실에 가까운 것은 붙잡힌 꼬리보다 숨어있는 머리 쪽이다. 반면에 5.18민주화운동을 떠올려보면 공식적으로는 그 실체에 해당하는 진범들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우리 사회는 그 총체적 진실에 상당히 접근해있다. 범인을 밝히는 것과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적지 않은 사건들에서 범인을 밝히는 것은 곧 진실을 규명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이렇게 도식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두 개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원인을 따져보면 추리물을 배제할 수 없다.

    추리물에서는 범인을 잡는 것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 같거나 연속적인 인과관계처럼 여겨진다. 스토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범인을 밝혀내기 위함이며,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곧 진실의 규명을 의미한다. 그 진실을 범인이 직접 자백하든, 탐정에 의해 밝혀지든, 아니면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드러나든, 어쨌거나 범인을 밝히는 것은 곧 진실을 밝히는 것과 연결된다. 설령 탐정이 범인을 밝히지 못했을지라도, 작가는 독자들에게는 범인을 밝혀준다. 어쨌거나 범인이 밝혀지면 이야기 내내 복잡하게 얽혀있던 진실의 실타래가 말끔하게 풀어지고, 독자들은 그 순간의 짜릿함을 느낀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짜릿한 아드레날린은 오랜시간 대중들을 사로잡은 추리소설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애석하게도 현실의 문제들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 때로는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실에 다가서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기도 한다. 오히려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들 속에서 더 큰 문제와 직면하기도 한다. 절도범을 잡았지만 그것이 생계형 범죄였을 때, 사소한 범죄를 검거했는데 그 뒤에 더 위험한 진상이 숨겨져 있을 때, 오늘 검거된 범인이 사실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었을 때, 분명 잘못을 저질렀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처벌할 수 있을 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우리는 다양한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한다. 과연 누가 잘못한 것이고,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등의 복잡다단한 질문들이 우리 곁을 맴돈다.

     그럼에도 추리물의 통쾌함에 익숙해진 대중은 현실에서도 그러한 자극을 기대하게 된다. 이 기대에 부응하듯 미디어는 통쾌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범행을 묘사하고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가해자에게 부여된 서사가 강해질수록 그가 더 악마화됨과 동시에, 사건의 진실에 대한 관심은 점차 희미해지고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진실을 논의하기 위한 원동력은 사라지고 천벌받을 사악한 인간을 검거했다는 '짜릿함'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짜릿함에는 피해자에 대한 치유도, 더 깊이 있는 진실에 대한 사유도,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은 찾을 수 없다. 자극만이 남을 뿐이다.

    이러한 자극이 더 무서운 이유는 인간이 자극에 아주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번 자극이 주어지고 그 자극에 깊이 중독되면, 내성과 금단증상으로 인해 더 강렬한 자극을 찾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짜릿함 또한 마찬가지다. 범죄를 보도하는 언론들의 수위는 나날이 높아지고, 그 건수 또한 급증하고 있다. 언론사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각종 매뉴얼과 보도기준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의 일처럼 여겨진다. 조회수와 화제성이 곧 언론사의 존폐를 결정하는 광고 수입으로 이어지다보니 자극적인 것을 보도하려는 경쟁은 갈수록 심화된다. 더 강한 자극, 더 선정적인 보도 속에서 진실의 목소리를 향한 여정은 한없이 요원해 보인다.


    특히 이러한 자극을 향한 욕구는 컨텐츠에 대한 반응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021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악마판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는 대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처벌을 집행하는 가상의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국민투표로 진행되는 만큼 곤장부터 전기의자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불문한 고문/처형 기구들이 등장한다. 성폭행, 갑질, 권력형 범죄 등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만큼 더 잔혹하고 자극적인 형벌이 주어진다. 국민들은 열광하고 정의는 더 굳건히 세워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건 속시원한 복수극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일 뿐이다. 드라마를 집필한 문유석 전 판사는 인터뷰를 통해 "엄벌주의가 극단화되어 갈 때의 부작용에 관한 '블랙 미러'식의 사고 실험이었다고 보시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복잡한 절차와 기준들 속에서 누군가는 소외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고찰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런데 시청자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듯 보였다. 디스토피아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 속 답답함을 해소해 줄 '정의로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반응들이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극 중 엄벌주의를 상징하는 재판장 강요한(지성 분)에게 깊이 이입하며 그의 행보에 열광했다.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에게 반기를 들며 절차와 처벌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좌배석판사 김가온(진영 분)은 영웅에게 반기를 드는 내부의 적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시청자들은 답답해했다. 어쩌면 이것은 강요한의 통쾌한 자극에 너무 무뎌진 나머지 김가온으로 대표되는 현실 속의 법치를 정의에 대한 장애물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키웠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겠지만 이러한 시청자들의 반응에 찜찜함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을 우울하게 담아내는 <명탐정 코난>과 추리물의 엔딩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순간이 아무리 기쁠지라도 그것이 마냥 기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우리가 그 사건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그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것. 우울한 해피엔딩은 통쾌한 자극에 가려져 우리가 잊고 있던, 진실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을 상기시켜준다. 

    물론, 범인을 잡고 그를 벌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아주 중요한 시스템이다. 누군가는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그들 덕분에 시민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범인이 잡히는 순간의 안도감과 짜릿함도 어찌보면 당연한 감정이겠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논의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은 답답하고 쓸데없어 보일지라도 그 토론을 통해 조금씩 전진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안전과 정의가 구현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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