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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Dec 15. 2020

괴물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③

즐거움이란 비참한 내 신세를 모욕하는 비웃음일 뿐이었고,
나는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했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creature,  메리 셸리는『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이렇게 표현한다)과 마주한 바로 그 순간, 그를 외면하고 도망친다. 탄생과 함께 존재를 부정당한 피조물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했고, 계속해서 인간 사회에 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혐오와 비난의 시선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원했던 피조물이었지만, 인류는 그를 거부했고 냉대와 혐오 속에서 그는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서 혐오와 멸시를 받는 내게는
세상 어디나 똑같이 끔찍할 게 분명했소.


     피조물이 가장 뛰어난 성장을 보였던 것도 자신을 탄생시킨 후 도피해버린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괴물’이라며 냉대했던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며 진심을 다해 함께 생활했던 눈 먼 노인을 통해서였다. 그는 노인을 통해 말과 글, 그리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인간’이 되어간다는 기쁨에 사로잡혔고, 그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사로잡혔다. 

    노인의 아들 부부는 피조물의 흉측한 모습만으로 그를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며 피조물이 그들 가족에게 보냈던 사랑과 선의를 모두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피조물은 배신감과 분노에 가득 차 그들의 집을 불태워버리며 비로소 ‘괴물’이 된다. 피조물은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괴물은 인간의 혐오와 냉대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모두 나에게 죄를 저지르는데
왜 나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오?


    사람들이 피조물에게 느꼈던 공포감과 불쾌함, 피조물이 느끼는 소외감과 절망은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보여준다. 괴물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표하며 그를 공격하거나 도망친다. 심지어 그를 창조한 프랑켄슈타인마저도. 하지만, 앞을 볼 수 없었던 노인만이, 그와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말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완벽하다'는 믿음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완벽함'에서 벗어난 대상이 자신의 완벽하지 못함을 직면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반문해야 한다. 당신은 진정 '완벽'한 사람인가. 세상에 '완벽한' 대상이 존재하는가.

    ‘완벽한 정상인’들이 만드는 세계 속에 ‘비정상’의 존재는 설 곳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도 ‘정상’이라는 개념은 비정상이 존재함으로써 정의된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허구의 순환논리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은 계속해서 등장하고, 정상에서 밀려난 ‘비정상’의 존재들을 통해 새롭게 정상인이 정의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에 속한 이들은 언제나 스스로 정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비정상’의 존재들을 경계 짓는다. 

     ‘정상’에 속한 그 누구도 ‘비정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 피조물을 쫓아냈던 인간들도 인간사회에서 보면 낮은 신분, 혹은 천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류층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존재로서 낙인찍힌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비정상’의 낙인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비정상’의 존재를 혐오하고 비난하며 스스로를 ‘정상’의 존재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새로운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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