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닫는 법을 먼저 배웠다

by 반짝별 사탕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말보다 분위기를 먼저 배우던 시간이었다.


친할머니는 내가 자라는 동안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사용하셨다.

일상의 기본값이 욕과 비난에 가까웠고,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공기처럼 존재했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 빈자리를 대신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가게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집에서 가까운 가게였지만, 엄마는 자주 집에 올 수 없었다.


나는 매일 학교를 오가며 엄마의 가게에 들러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끝까지 들어주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에 쫓겨 살아가느라 어린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끝내 없었다.


들려오는 말의 대부분이 욕이거나 비난이었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인다는 행위는 나에게 따뜻함이나 위로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로 남을 가능성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귀를 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다. 내 마음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고, 내 말을 자세히 들어주려는 어른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닫힌 귀’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닫힌 귀는 분명 단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을 때만 귀가 열린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판단되면 눈과 귀를 동시에 닫아버린다. 이는 무관심이라기보다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익혀온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배우려는 것들조차 귀에 담기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졌고, 그 사실을 인지할수록 아쉬움도 함께 커진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의식적으로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입을 닫는 연습을 하고 있다. 웃음이 날 만큼 어렵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해내고 있다. 아이 앞에서 욕이나 부정적인 언어를 쓰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살아온 환경을 그대로 언어로 되물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미 나도 모르게 습득한 언어들이 아이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고 싶다. 언어는 선택될 수 있고, 환경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끝까지 말해도 괜찮은 시간’을, 적어도 내 아이에게는 건네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과거와 나 사이에 놓을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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