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8
연말 학교 축제 시즌이 되면 늘 분주해진다. 축제를 준비하는 부서 선생님들과 학생부 아이들은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다. 학급 및 학생 수가 많이 늘어 이번 축제는 학년별 오전, 오후로 나뉘어 1부와 2부로 진행됐다. 교실마다 다양한 부스를 꾸미고, 강당에서는 무대 공연이 이어진다. 춤, 노래, 악기 연주까지. 오디션을 거쳐 무대에 오른 아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끼를 뽐낸다.
특히 3학년 학생회장 C가 고생이 많았다. 작년에 가르쳤던, 예의 바르고 사회성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훌륭한 학생이었다. 처음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뭐라도 하나 꼭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 C와 학생회 아이들이 학년말 축제 준비 기간에 들어서면서 올해는 특별히 ‘복면가왕’ 이벤트를 기획했다며, 나에게 출연을 부탁해왔다. 몇 번이나 정중히 거절했다. 괜히 민폐가 될까봐, 그리고 아이들의 축제는 아이들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고 얼마 뒤, 인자하신 인문사회 부장선생님까지 부탁을 해오셨다. 마음이 약해졌다. 열심히 준비하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마음을 더 외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올해 맡았던 담임반 아이들과의 합도 좋았기에, 무대에서 아이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종업 전 마지막으로 특별한 추억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출연을 수락했다.
노래 선정은 쉽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라도 아이들이 모르면 함께 즐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국 가끔 노래방에 갈 때면 부르던 ‘응급실’을 선택했다. 노래방 인기차트 위쪽 어딘가에 늘 위치해 있는 곡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많이 들어본 노래라 따라 부르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다. 수업하며 활동하는 시간에 노래를 살짝 틀어봤더니 예상대로 아이들이 따라 부르며 좋아했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때부터 틈나는 대로 노래방에도 가고, 출퇴근 길 차 안에서도 연습을 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감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도 조퇴가 잦아졌고, 다른 선생님들도 아파서 마스크를 착용하신 분들이 많았다. 하루는 한 반에서 열 명 가까이 결석하거나 조퇴하는 일도 있었다. 나 역시 으슬으슬하다 싶더니 축제 이틀 전, 결국 감기에 걸려버렸다. 목이 심하게 부어서 말하기조차 힘든 상태가 됐다. 무대에 설지 말지를 계속 고민했다. 병원에 가서 약도 처방 받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목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축제 전날, 내일 아침 상태를 보고 최종 결정하자는 마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축제 당일 아침, 출근해서도 목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쇳소리가 나는 기침이 어떻게 해결이 안 되었다. 무대에 서는 건 무리라 판단해 공연 흐름을 살피던 부장님께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부장님. 감기 때문에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듣는 사람들도 고역일 거예요…”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녜요, 선생님. 그냥 하셔요.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그 따뜻한 말에 마음이 다시 약해졌다. ‘그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데, 목이 나간 게 대수겠어, 망쳐도 그냥 하면 되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내 키와 비슷한 학생이 빌려준 활동복으로 갈아 입고, 학생회 아이들이 정성스레 만들어 준 가면을 쓴 채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 됐다. 조명 아래 무대에 홀로 섰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서 있는 모습만 보고도 눈치 챈 듯했다. 위태로운 목소리로 1절을 간신히 불렀다. MC를 맡아 진행한 학생 S가 힘차게 외쳤다. “이제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해주세요!” 아이들이 보내주는 큰 환호성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동도 잠시, 2절 후렴을 부르려던 순간 목소리가 완전히 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꼭 잡은 마이크는 내려가고,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아이들이 큰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
옆에 앉은 친구들과 박자를 맞추어 팔을 올려 흔들며 응원해주는 학생들. 그 무대는 ‘아이들을 위해’ 섰으나, 그들이 완성해준 한 장면이 되었다. 올해 아이들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시금 느꼈다. 고마운 마음으로 어떻게든 끝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무대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와 다음 무대를 준비하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떨리는 걸 어떻게 이겨내고 무대에 서는 거니…?”
아이들은 웃으며 답했다. “선생님도 방금 해내셨잖아요!”
그렇게 1부 공연 순서가 끝나고, 2부에서는 반 아이들과 함께 준비한 ‘랜덤 볼링장’ 부스 운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책걸상을 잘 배치해 나름 3개의 레인 형태를 만들었다. 가장 재밌는 포인트는 ‘랜덤 볼’이었다. 제비를 뽑아 탱탱볼, 테니스공, 럭비공, 심지어 탁구공까지 등장하는, 어떤 공으로 던질지 알 수 없는 구조의 체험 부스였다. 부스를 방문한 학생과 선생님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반별 부스 운영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3월, 어색하게 눈만 마주치던 아이들이 이제는 함께 의견을 모으고, 물건을 준비하고, 시간을 나누며 움직인다는 것을, 참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하루 내내 진행된 축제가 모두 끝난 후, 다시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을 데리고 정리를 시작했다.
“선생님 너무 재밌긴 했는데, 정말 힘들어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 이것저것 예쁘게 꾸며놓았던 것들이 이제는 치워야 할 숙제가 된다. 책걸상에 엎드려 뻗어 있는 아이들에게 “같이 정리하자~”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약해져서는 더 엄하게 대하지 못했다. 나 역시 온종일 돌아다니며 서 있던 몸이 천근만근이었으니까. 사실 담임을 하며 이런 마무리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빠짐없이 함께 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서로 조금씩 더 힘을 내어 하나라도 더 정리하며, 친구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한 명 한 명을 몇 번이나 다독였다.
드디어 다 치우고 모여 앉은 종례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그 수고와 헌신을 선생님의 눈에 담아두었어. 오래오래 기억할게. 그런 너희가 복 받기를 바라. 선생님은 너희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할거야.”
아이들이 다 집에 돌아간, 창 밖 저녁 어스름이 내린
텅 빈 교실의 의자 하나에 잠깐 걸터 앉았다.
‘올해도 며칠 안 남았구나—’
함께하며 많이 성장한 아이들을 보는 것,
그 자체에 축제의 기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은 교과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런 축제의 순간에도 우리의 교육은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도. 분주하고도 따뜻했던 하루, 아이들과 쌓은 이 소중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을 것을, 언젠가 떠올릴 그날에 나의 마음 한 구석을 환하게 밝혀줄 것임을, 벌써부터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