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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크리스마스

제3화 모래밭의 천사들

by Stardust

이 작품은 〈순간의 좌표〉 SF 단편집에 재수록되었습니다.

12월 11일부터 연재 중인 브런치북에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만나보세요.




“우리 땡땡이 치자!”

J가 불쑥 소리쳤다.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땡땡이? J, 우리가 어디에 있지?”

J의 인생 속도가 빠르게 되감기고 있었다.

P가 한발 물러서자, J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쉿! 지금 대수학 수업 시간이잖아."

J가 주름진 눈을 가늘게 흘기더니 P의 귓가에 속삭였다.

“창밖을 봐. 눈이 펑펑 내려. 우리는 당장 나가야 해!”

J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개구쟁이 표정의 J는 지금 스무 살 대학생이었다. P는 은발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J에게서 발랄하고 청초했던 옛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특유의 보조개를 만개하며 P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그는 맨발로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아 신발을 신기고 외투를 입혀주었다. 그가 오십 년을 함께 산 금혼식 기념으로 선물했던 토끼털 코트는 헐렁해져 망토를 두른 듯했다.

P가 옷을 입히는 동안 J는 신이 나 있었지만 유순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문을 나서 리셉션 데스크 앞을 살금살금 걸어갈 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막느라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아야 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P가 고개를 돌려 리셉션 직원에게 윙크했다. 직원은 그들이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짐짓 모른 척해 주었다.


건물 밖으로 탈출하자 J가 기습 볼 뽀뽀를 했다.

대학 시절 이과대학 석조건물 앞에서처럼.

그들의 첫 키스.

P는 J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볼살이 하나도 없는 해쓱한 얼굴이 마음 아팠다.

P는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냄새가 두려웠다.

그녀가 먼저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처럼 대담하고 짜릿했다.

아찔한 입맞춤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촉촉했고 그때처럼 아릿한 샴페인 맛이 났다.

P는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어느새 입술이 떨어지고 J가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도 P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외투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J를 폭 감싸 안았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밖은 쌀쌀했다. 모래 폭풍은 잠잠해졌지만, 어린이 놀이터처럼 사방이 모래로 가득했고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J는 마음처럼 간단하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P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힘겹게 몇 걸음을 떼던 그녀가 멈추어 섰다.

“와, 아름다워."

J는 나이도 잊은 채 폴짝폴짝 뛰었다. 그녀 눈에는 P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듯했다.

공중에는 모래 알갱이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날아다녔지만, J는 감탄하며 고개를 젖혔다.

행복해 보였다.

곁에 선 P에게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P는 그대로 휩쓸리고 싶었다.


P가 스무 살이던 해, 첫눈이 내리던 날.

첫 키스를 먼저하고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백 년이었다.

그날 내리던 눈은 그해의 첫눈이자 그 도시에 내렸던 마지막 눈이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그날 이후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지구 어디선가 또 눈이 내렸을지 몰라도, 두 사람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둘은 십여 년간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연애 끝에 결혼했다. 기나긴 그들의 결혼 생활이 내내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P는 그가 가졌던 야망만큼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고, J 역시 평생 연구해온 기술이 빛을 보기 전에 병들어버렸다. 무엇보다 아들을 앞세운 둘은 아직 살아 있었다.

찰나 P는 종종 자신에게 묻곤 하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 군대에 가겠다는 S를 말렸다면, 아내와 아들은 아직도 바닷가 그 집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P도 유토피아에서 J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유토피아는 인기가 많았고 한 번 입소한 노인들은 쉽게 죽지 않았다. P에게는 순번이 돌아오지 않았다.

P는 혼자 사는 것이 도무지 낯설고 힘들었다. 요리, 세탁, 청소 그리고 살기 위해 처리해야 할 온갖 자잘하고 반복되는 일상들이 버겁고 짜증 났다.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도시 변두리로 이사해서 어쩌다 건질 수 있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자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졌고 고통도 무뎌졌다.


그렇게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고 무덤이나 다를 바 없는 파라다이스에 들어갈 처지가 되었다. P는 옛 동료나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바닷가 마을에 가본다 한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다시 만나긴 어려웠을 것이었다. 어쩌면 파라다이스에 가야만 옛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녀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P. 내가 살며 보았던 모든 눈송이 숫자보다 더 너를 사랑해.”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던 P에게 J가 깜짝 고백했다.

J는 언제나 그랬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거나 엉뚱한 행동을 했다. 그녀만의 매력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행성으로 여행 다닐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닷가에 집을 짓고 정착할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너를 사랑해! 이 세상 모든 빗방울과 모래알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P가 외치자 J가 응수했다.

“나는 우주에 있는 별 보다 더 많이!”

둘은 서로 더 많이 사랑한다고 외쳤다.

백 살도 훨씬 넘은 노인들이 유치한 사랑 고백 경쟁을 했다. 추운 날씨 탓에 둘은 하얀 입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P는 사랑을 외칠 때마다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이 느껴졌다.

P는 마음먹었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기로. 과거에 대해서, 내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그도 그녀처럼 그저 이 순간만을 살고 싶었다.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이 순간을 반드시 기억하리라.


P는 먼 길이었지만 그녀를 만나러 오길 잘했다고, 이만하면 그녀와 한평생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뒤로 바람결에 실린 모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하늘의 구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 우리 눈 천사를 만들어요.”

J가 P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럴까?”

P가 말했다.

어린 시절로 질주한 그녀는 막무가내로 모래밭에 누우려 했다. 하지만 백이십세 노인인 J의 동작은 굼뜨고 느렸다.

“조심. 조심. 눈밭에서 미끄러지면 다쳐.”

P가 타이르듯 말했다.

J가 앙상한 무릎을 구부리는 동안 P가 뒤에서 부축해야 했다. 그녀는 유치원 꼬마보다도 가벼웠다.


J가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이윽고 양 팔다리를 위아래로 휘저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천진난만해진 그녀의 얼굴 위로 S의 환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S가 좋아했던 놀이였다. 어디선가 S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P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 옆에 누워! 재밌어.”

J가 소리쳤다.

P는 모자를 벗어 발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양손으로 모래밭을 짚어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웠다. 모래 알갱이들이 머리에 파묻힐 정도로 몸을 길게 쭉 뻗었다. 등 아래 모래가 차가워 정말로 눈밭에 누운 느낌이었다.

“어때?”

“좋아.”

P가 대답했다.

“정말 재밌어.”

J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내가 이럴 줄 몰랐어.”

그녀가 말했다.

“뭐가?”

“보고 싶을 거야.”

P가 고개를 돌려 J를 보았다. 그녀가 웃었다.

“나도.”

P가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

P는 질문 대신 머리 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그들 위로 흘러갔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보안 직원이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P가 누운 채로 손짓을 해 그를 세웠다. 직원은 더 다가오지도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해피 크리스마스."

J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P도 화답했다.

유토피아의 마당 한가운데 누운 P와 J는 팔다리를 위아래로 휘저으며 천사의 날개를 만들었다. 그들은 어두워지는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을 했다. 모래밭에 그들이 만든 궤적을 따라 날개가 생겼다. 이대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천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흘러간 세월을 거슬러 함께 날아올랐다.


캐럴이 그치자 아득히 먼 곳에서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십오 분이 지났다.

그때였다. 모래 알갱이를 뒤집어쓴, 볼우물을 가진 천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P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하늘의 구름이 태연하게 흩어졌다.

어느새 종소리도 멈추었다.

하지만 P는 행복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 저는 유토피아에 오고 싶은 사람입니다.”

P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대답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려다 마음을 바꿨는지 고개를 돌려 J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J가 누운 채로 말했다.

P는 먼저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손을 뻗어 J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J는 모래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고쳤고 P는 모자를 찾아 썼다.

“친절하시군요. 고마워요.”

J가 볼우물이 파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찰나 P는 J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J만 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

P가 거친 생각에 휩쓸리자, 잊고 있던 통증이 밀려들었다. P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P가 눈을 떴을 때 택시가 보였다.

구름 사이로 P를 파라다이스로 데려갈 택시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이서 둘을 지켜보던 직원이 다가왔다. 직원을 알아본 J가 눈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P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안녕히 가세요.”

J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P의 목소리가 떨렸다.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P는 J의 얼굴에서 어떤 의미를 읽고 싶었지만, J는 해맑은 표정이었다.

“행운을 빌어요.”

J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P는 J의 눈빛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

P는 문득, 그 질문조차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더 깊이 사랑했다.

P는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P는 잠시 멈췄다가, J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P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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