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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위트 홈

SF 단편 소설

by Stardust

타닥타닥 참나무가 타들어가는 벽난로 앞에서 준이 엄마와 퍼즐을 맞추고 있다.

엄마가 코를 찡긋 들어 흘러내리는 안경을 멈춰 세웠다.


퍼즐과 함께하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모서리가 아메바처럼 생긴 퍼즐조각을 맞춘 뒤로 일 분이 넘었다.


“찾았다!”


눈이 시려올 때까지 그림판을 뚫어지게 보던 엄마가 드디어 퍼즐조각을 내려놓는다.

회전목마에 달린 붉은 지붕의 정중앙이었다.

제이가 맞추자마자 준이 탄성을 지른다.


“와, 여기였어.”


준은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을 제이가 방금 맞춘 퍼즐 옆자리에 쏙 끼워 넣으며 말한다.


“내 자리는 엄마 바로 옆자리.”


준이 속도를 내면서 천막의 또 다른 귀퉁이를 채우는 동안 제이는 건조해진 두 눈을 천천히 깜박여 본다.

그때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댕! 댕! 댕!


“이런, 밤이 깊었네. 준, 우리 자러갈 시간이야.”

제이가 말한다.


“엄마, 우리 오늘 밤 다 맞추고 자면 안돼요?”


회전목마 지붕의 마지막 빈칸까지 채운 준이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며 조른다. 놀이공원이 그려진 오천 피스 직소퍼즐은 빈 부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맞출 수 있는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들은 다 맞추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퍼즐은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다.


망설이는 제이의 시야에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준의 얼굴을 집어 삼켰다.


놀란 제이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자, 준이 다정하게 묻는다.


“엄마, 뭐가 있어요?”


이번에는 귀여운 준 얼굴 대신에 허름한 기계가 보였다.

제이는 안경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벼본다. 통증만 더 커진다.

준이 걱정스레 묻는다.


“눈이 아파요?”


“아니야, 퍼즐을 너무 오래 했나봐.”


그러자 준이 말한다.


“오늘은 그만할까요? 오늘 다해버리면 내일 할 게 없어지잖아요.”


방금 전 까지 조르던 아이였다.

엄마를 배려할 줄 아는 기특한 아이.


“대신 퍼즐을 다 맞추면 놀이공원에 가요.”


“놀이공원?”


“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고 싶어요.”


아이다웠다.

퍼즐 속 놀이공원만 아는 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그래, 퍼즐을 다 맞추면,…그땐 놀이공원에 놀러가자.”


준은 펄쩍 펄쩍 뛰며 좋아했다.

제이의 가슴 속, 노랑나비가 파르르 날갯짓을 한다.


“약속했어요. 우리 엄마, 최고!”


준이 손 하트까지 날리자 제이가 받아 심장에 올려놓고 쓰러지는 척 한다. 준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둘은 죽이 잘 맞는 모자다.


행복했다.

이제 나비들이 여기저기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전화 왔어요.”


제이는 멈칫하지만 받지 않는다.

벨 소리가 한참 울리다 멈춘다. 다시 울리지 않는다.


제이는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낮에 공놀이를 하다가 깨진 거울이 시야에 들어온다.

옆에 구르던 노란 공도 그대로.


준과 보낸 '행복한 하루'는 고단하고 대가가 따른다.



그날 밤, 제이는 준옆에 누워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림책 활자가 제법 큰 데도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두통까지 올 거 같다. 제이는 자꾸만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비비자, 준이 직접 책을 읽는 척 한다.

외운 내용이었다.


“…가족을 다시 만난 소년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책을 덮고 준이 속삭인다.


“엄마, 나도 모험을 떠나고 싶어요.”


제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우리 준은 하고 싶은 게 많네."


“제일 해보고 싶은 건 놀이공원으로 모험을 떠나는 거예요.”


“그럼 혼자 가려고?”


“엄마랑 같이 가야죠. 엄마도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날 거죠?”


제이는 대답하지 못한다.


제이는 준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해 본다.

‘놀이공원이라…하긴 대단한 모험이 될 거야.’


제이의 목을 감싸 안았던 준의 손이 스르르 풀린다. 파랑색 자동차가 그려진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자 준은 깊은 잠에 빠진다. 천사 같은 모습이다. 제이는 준의 차가운 이마에 뽀뽀를 하고 탁자 옆의 전등불을 끈다. 가만히 방문을 닫고 나온다.


거실에서 부재중 통화를 확인한다. 전남편이다. 문자도 와 있다.

글자가 흐릿하다.

제이는 안경을 벗고 검은 밤을 바라본다. 노란 불빛들이 번져보인다. 제이는 눈두덩이에 무지근한 통증을 느끼며 결심한다. 센터에 가봐야겠다고.



전날처럼 찬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집 안에 갇힌 모자는 공놀이를 한다. 그리고 거울이 깨진다.


다르지만 비슷한 하루가 지나고, 오후가 되자 준이 퍼즐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싸늘한 기운을 느낀 제이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퍼즐 상자를 쏟아 펼쳐 놓는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춘다.


그때 제이의 시야가 다시 흐릿해지면서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비벼도 나아지지 않는다. 곧 두통도 찾아올 것이다.

창밖에 비가 개고 햇살이 비쳐든다.


제이가 말한다.

“안경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아. 안과에 다녀와야겠어.”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지금요?”


놀란 목소리다.


“그래, 지금.”


제이가 단호하게 말하며 외투를 입자 준도 벌떡 일어난다.

“저도 같이 갈래요.”


“집 밖은 위험해요. 퍼즐 맞추면서 기다려요.”


현관까지 따라나선 준이 외투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앉자, 제이는 무릎을 꿇어 준과 눈을 맞추며 말한다.


“우리 준, 퍼즐 맞추기 좋아하잖아. 잠깐만 혼자 놀아요. 엄마가 금방 돌아올게.”


이 말을 남긴 제이는 무거운 오크 현관문을 열고 눈부신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간다.




바깥세상은 한창 봄날이다.

잔잔한 호숫가 둘레 숲에서는 새 소리가 들리고 내리쬐는 오후 햇볕에 등이 따뜻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라일락 꽃 사이로 색색이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그 평화로운 풍경에서 제이는 묘한 불안을 느낀다.


그때, 그녀 앞에 하얀 나비가 나타난다. 손을 내밀자, 나비가 피하지 않고 곧장 날아든다.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나비의 눈 속에 카메라 렌즈가 있었다. 화들짝 놀란 제이가 뒤로 물러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다. 반사적으로 팔을 휘젓는 순간, 안경이 허공으로 튀었다.


그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호수도, 나비도, 꽃도 갑자기 사라졌다.

제이 앞에 펼쳐진 건 황폐한 거리였다.

호수가 있던 자리에는 기름막이 떠다니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꽃은 온데간데 없다. 썩은 나무 열매가 바닥을 뒹굴며 악취를 풍겼다. 흐린 하늘에는 곤충이나 새 모양을 한 드론들이 소리 없이 세상을 정찰한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안경이나 헬멧을 쓴 채 널브러져 있다.

제이의 발치에는 초라한 남자가 헬멧을 쓴 채 주저앉아 있었고, 그의 곁에 안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놀란 제이는 안경을 얼른 움켜쥔다. 표면에 흠집이 나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안경을 다시 쓰자 꽃길이 되살아났지만, 나무들은 서로 엉켜 있었다.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제이는 안경을 벗지 않았다.
현실을 보는 것이 더 두려웠다.


잠시 후, 그녀가 설정해둔 경계를 벗어나자 0과 1이 중첩된 숫자 행렬이 공기 중에 흘러내렸다.

시뮬레이션 밖의 세상도… 시뮬레이션일까?
그렇다 해도, 제이는 놀라지 않는다. 세상은 원래 답을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으니까. 제이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심스레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


언제부터인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기준으로 두 개의 구역이 형성되었다.

S 구역은 전체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슈퍼 양자컴퓨터이자, 각자의 메타세계에 빠진 시뮬러들이 사는 곳.
강 건너편 R 구역은 한때 제이가 살던, 현실의 냄새가 남아 있는 곳이다.

제이가 향한 곳은 X Change 센터.
R 구역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기차역은 스산했다. 플랫폼 한쪽에서 늙은 개가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제이의 머리를 흩뜨린다.

진짜 바람이다.

안경을 벗자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와 뒤섞인 여러 냄새가 밀려왔다. 불쾌하지 않았다.
— 삶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외투 주머니에는 전남편이 보내온 기차표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R 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제이는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강은 넓고 물살은 셌다.
녹슨 철교 위로는 기차가 다녔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가끔 건너오는 사람은 있어도, 건너가는 사람은 없었다.


S 구역 사람들에게 기차표는 벅차고, 이곳은 메타세계에 중독된 이들이 모여드는 삶의 종착역 같은 곳이었다.
현실은 잊고, 원하는 대로 시뮬레이션되는 세계만을 탐닉하는 사람들.

어차피 덧없는 삶이라면, 원하는 대로 살다 가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지 모른다.


제이는 다시 안경을 썼다.


센터 앞에 서자, 건물이 제이를 인식하고 문이 열렸다. 새하얀 방. 깊은 곳에 칸막이가 있고, 철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의자에 앉자 인기척이 들렸다. 감청색 철도원 유니폼을 입은, 머리 희끗한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기차를 타러 오셨나요?”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
칸막이의 액정에 기차 시간표가 떠오른다.
제이가 가지고 온 기차표도 시스템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매일 정오에 왕복 운행하는 기차가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뇨. 저는 X Change 센터를 찾아왔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변했다.

회색 작업복에 친절한 몸짓. AI 서비스 직원이었다.


“X Change 센터의 톰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머리 위 유리판에 '무료 상담 오 분'을 알리는 문구가 뜬다.

제이가 서둘러 말을 꺼낸다.


“시뮬레이터에 버그가 생긴 거 같아요. 화면이 깨지면서 중첩되요. 눈도 시리고요.”


“검사 해드리겠습니다.”


톰은 시뮬레이터 안경을 받아, 원반 위에 올렸다. 회전하는 원반 위로 복잡한 코드와 수식들이 흐르듯 지나간다.


“‘스위트 홈’ 초기 버전이군요. 요즘은 모두 ‘홈 스위트 홈’으로 옮겼는데 아직 이걸 쓰셨네요.”


제이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시멘트 동굴 같은 공간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숨까지 참으면서 두 눈도 꼭 감은 채 기다렸다.
안경을 벗은 사람을 위한 배려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얼른 다시 쓰고 싶었다.


잠시 후 톰이 안경을 건네주자 제이는 서둘러 그것을 받아 썼다.
눈앞이 다시 새하얀 방으로 환하게 바뀐다.


"철저히 분석해본 결과 버그는 없습니다. 시뮬레이션은 모두 고객님이 직접 설정한 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안경에 아무 이상이 없고, 버그도 없다는 말에 제이는 화가 났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제이는 머쓱했다.

속으로는 과연 AI 에게 답을 들을만한 질문인지 싶었지만, 서비스 직원이 아니면 누구에게 묻겠는가?


“그걸 제게 묻는 건가요?”


톰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건 좀 철학적인 질문인데요. 아니, 존재론적 질문일까요?”


톰의 말을 들은 제이는 속으로 그가 철학자나 심리학자로 변할까봐 걱정 되었다.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명확히 설명해야 햇다.


“내가 설정한 세상은 하루가 전부예요. 즐거운 집에서 행복한 매일을 반복하는 세상이라고요. 그런데 준이 자꾸 내일을 말해요. 집 밖 세상을 궁금해 하고, 모험을 하고 싶어 한다고요.”


제이의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지만, 톰은 서비스 직원답게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 때문에 제이는 당황했다.
안경을 자주 벗어서 자의식이 돌아온 탓일까.
아니면, 아이의 모험심을 버그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일까.

눈앞의 톰은 단지 멀티 기능을 수행하는 다목적 AI일 뿐이었다.

게다가 비용 절약 차원에서 고용된, 말 그대로 ‘서비스 직원’.

그런 톰에게 제이는 ‘내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톰이 진지하게 시뮬레이터 데이터를 다시 점검하며 말했다.

"구 버전이긴 하지만 ‘스위트 홈’ 시리즈는 안정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 설정한 고객의 취향, 선호, 선택을 바탕으로 그 한계 안에서만 구동되지요. 요즘은 모두 카오스 포메이션을 따르지요. 아, 잠깐만요. 지금 보니 반전이 설정되어 있었군요."


“반전이요?”


“네, 고객님이 설정한 반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것을 포함한 반전이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설계했는데, 이게 다일 리가 없다.


하지만 제이는 처음 어떤 설정을 해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이 개시되면 설계도는 사용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결론을 알면 재미가 반감되고, 동시에 유저가 세상에 머무르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머리 위 유리판의 무료 상담 타이머가 10초 정도 남았다.

제이가 모든 상황을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앉자, 톰이 입을 열었다.


“고객님, 무료 상담시간은 끝났습니다. 저희 서비스에 만족하셨나요? 부디 높은 별점을 부탁드립니다.”


기계적인 미소였다.


“아, 잠시만요. 시스템 버그가 아니라면 눈이 시리고 아픈 이유가 뭔가요? 자꾸 세상이 깨지고 겹치기까지 하던데요. 이건 설정이 아닐 거 같은데요.”


“눈이 시리고 아프다고요…”


톰은 벌써 하얀 가운을 입은 검안사로 변해 있었다.
그는 시력 검사를 시작했고, 제이는 지시대로 눈동자를 굴리며 움직였다.


“수정체의 탄력이 감소되어 조절력이 떨어지는 증상입니다. 한마디로 노안이 왔습니다.”


“노안이요? 하지만 나는 겨우 서른여섯인데요.”


“시뮬레이션 거주 시민들이 흔히 겪는 조기 노안입니다. 근거리에만 초점을 계속 맞추다보니 수정체에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치명적인 버그가 아니라 노안이라니, 다행이면서도 왠지 서글펐다.


이번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영업사원 톰이 앞에 앉아 있었다.


“새로 출시된 하이퍼 렌즈는 생각만으로도 현실과 시뮬레이션 세상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노안 교정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습니다.”


“톰, 나는 새 안경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제이가 낡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 신제품 출시 마케팅 차원에서 선착순 무료 체험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저도 사용 가능한가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제이에게 톰은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운이 좋으시네요. 하이퍼 렌즈의 장점은,….”


톰의 말문이 청산유수로 이어졌다. 설정상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도록’ 되어 있는 듯했다.


집에 혼자 둔 준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제이는 끝까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긴 제품 설명이 끝나자 톰이 서랍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안경을 꺼냈다.


“하이퍼 렌즈 체험에 동의하십니까? 그럼 이 약정서를 확인하시고 동의 사인을 하셔야 합니다.”


제이는 액정패드를 건네받자마자 서둘러 사인했다. 절차가 끝나자 톰은 새 안경을 칸막이 너머로 밀어주었다.

날렵한 테, 깨끗한 푸른빛 렌즈.
오래된 안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경을 바꿔 쓰는 순간, 무미건조한 하얀 방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오! 세상에.”


가구 하나 없던 방에는 현대적인 가구가 놓여 있는 고급 상담실로 변해 있었다.

제이가 감탄하자, 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제이님의 취향을 반영한 ‘홈 스위트 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하이퍼 렌즈는 구 버전과 호환이 안 되거든요.”


“홈 스위트 홈이요? 그럼 설정 내용이 달라지나요?”


“아닙니다. 처음 설계한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기존 서비스보다 ‘카오스 포메이션’이 강화됩니다.”


“카오스가 강화된다고요? 처음 듣는데요.”

제이가 당황했다.


“방금 사인하신 약정서에 모든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카오스는 말 그대로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유저가 무언가 행하기 전까지 어떤 설정값도 존재하지 않죠. 설정값이 없으니 우연과 인연으로 상황이 벌어집니다.

자세한 사항은 약정서를 꼼꼼히 읽어주시길 추천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이퍼 렌즈는 착용 후 하루가 지나야 최대 효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잠시만요, 이건 말도 안 돼요.”


“한 달 이내로 사용 소감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아, 그것도 약정서에 있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 * *


남겨진 아이는 일찌감치 퍼즐을 다 맞추었다. 공놀이도 해보았지만 혼자서는 재미가 없었다.

현관을 노려보던 아이는 엄마가 집 밖은 위험하다고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집안의 고요가 점점 아이를 삼키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거실 벽난로 위 액자들을 훑고 지나가다, 결국 자신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지만, 아이는 그곳을 기억할 수 없었다.


오후 여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아이는 이상하게도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결국 아이는 문밖으로 나섰다.


해질녘 마당은 온통 금빛이었다. 새가 울고, 꽃들 사이로 나비가 날았다. 아이도 모르게 대문 밖까지 나비를 뒤쫓았으나 나비는 훌쩍 날아가 버렸다. 새 역시 멀리 날아갔다.


길모퉁이에 아이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반가워 다가가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시무룩해진 아이는 정처없이 걸었다.

집에서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만, 어느새 주변 풍경은 낯설기만 했다.


S구역을 비행하던 정찰용 까마귀 드론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드론은 로봇간 교신 채널로 식별정보를 요구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드론은 근접 스캔을 시도했지만 동기화 기록조차 나오지 않았다.

곧바로 경계 태세로 전환되며 외부 스피커가 울렸다.


“멈춰라! 등록된 식별정보를 대라”


잠시 후, 반응이 왔다.


“나? 나는 준이야.”


“준이라고? 내가 아는 한 그런 모델은 없다. 정확한 모델번호를 밝혀라.”


드론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를 본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엄마!”


준은 손까지 흔들어보지만 엄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뭐라고, 엄마? 주제 파악을 해라. 등록도 안 된 깡통 주제에.”


“깡통이라고? 감히 드론 주제에.”


아이가 화내자 드론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회전날개를 가속했다. 부리가 아이에게 내려꽂혔다.

겁먹은 아이는 도망치면서도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예요! 여기 좀 보세요!”


“아직도 네가 사람인 줄 아는 거냐? 저능한 로봇 같으니라고.”


쫓기던 아이는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아이는 물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잔잔한 물 위에 비친 얼굴.
왼쪽 눈가에서 이마까지 찢긴 피부 사이로 복잡한 회선이 드러났다.


아이는 다시 들여다보았다.
물속 그림자는 분명했다.


그동안 자신이라 믿었던, 보송한 뺨과 갈색 곱슬머리의 소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잡동사니를 엮어 만든 어설픈 휴머노이드 기계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아닌,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덜거덕— 덜거덕—


마당으로 뛰어들자 드론의 추격도 멎었다.


아이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집에 돌아와 보니 준이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쓰레기가 쌓여있는 거실 한 쪽에 완성된 퍼즐이 놓여 있었다.


제이는 진이 빠지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새 안경을 쓴 그녀는 초점을 맞추는 연습을 하며 집안을 정리했다. 근거리, 중간거리, 먼 거리—렌즈에 적응할수록 세계는 안정되어 갔다.


제이는 준이 숨바꼭질할 때마다 숨어 있던 물푸레나무 옷장 앞에 섰다.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소년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제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눈동자 안에서 렌즈가 작동하는 게 보였다. 제이는 아이 너머 세상을 본다.

순간 제이가 휘청했다.


메타세계의 명령어와 현실의 사물들이 겹쳐 보이며 현기증이 일었다. 새 시뮬레이터의 감각 각성력이 너무 강했다.


“엄마… 엄마!”


아이가 떨었다.

제이는 로봇이자 준인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했던 준이었다.

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매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제이가 선택한 찬란한 허무였다.


제이가 손을 벌리자, 주저하던 아이는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엄마를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제이는 몸서리치는 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엄마… 저는 언제까지나 엄마 준이죠?”


아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당연하지. 언제까지나 나의 준이지.”


그날 밤, 제이는 잠든 준의 리셋 버튼을 눌렀다. 찢어진 얼굴은 재생 실로 깔끔히 수선되었다.


그리고 R구역의 전남편에게 답장을 보냈다.
기차표는 고맙다고.
하지만 준을 두고 혼자 갈 수는 없다고.


날이 밝았다.
엄마와 준은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홈 스위트 홈’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선명하다. 수선화가 핀 마당을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둘은 잔디가 깔린 앞마당에서 부메랑을 던지며 놀았다.


준이 뛰어올라 빨간 부메랑을 낚아챘다.


“이번엔 제 차례예요! 엄마, 잡아요!”


아이의 부메랑이 힘차게 날아갔다.
제이의 손끝을 살짝 스친 부메랑이 거실 창을 향해 날아들었다.

와장창!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다. 부메랑이 툭 하고 화단 그늘에 떨어졌다.


제이는 놀란 준을 남겨두고 집으로 달려갔다.

흉측하게 깨진 창을 보자 불길한 감각이 머리를 스쳤다. 떨어진 유리 조각 앞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새 안경이 제대로 작동하길 바라며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준이 눈앞에 와 있었다.

창백해진 제이는 준을 와락 안았다.


품 안에서 준이 즐겁게 노래하듯 말했다.

“엄마, 우리 오늘 놀이공원으로 모험 떠날 거죠?”


“오늘…?”


제이가 천천히 손을 풀었다.
빤히 올려다 보는 아이는 사슴같은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제이는 깨달았다.


어쩌면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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