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사진, 블레드 호수. 눈 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초록 호수 한가운데, 그림 같은 섬과 교회가 떠 있다. 어릴 적 읽던 동화책 갈피에서 툭 튀어나온 것만 같은 풍경. 그래서일까, 딸아이는 이번 여행에서 이곳을 꼭 와보고 싶어 했다.
'그래, 나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이른 아침, 류블랴나를 빠져나온 버스는 산과 들 사이를 달린다. 창밖으론 어디를 봐도 알프스의 자락이 걸려 있다. 설레는 마음을 싣고 달리는 길, 우리의 목적지인 동화 속 호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덕 위 정류장에 내려 달려 내려가니, 거짓말처럼 초록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배도 고팠지만, 당일치기라 마음도 급해졌다. 호숫가를 제일 먼저 둘러보았다. 선착장에는 사람들을 제법 태운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Pletna)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배에 오르자 먼저 타고 있던 이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바로 출발인가 싶었는데 뱃사공이 고개를 저었다. 규칙 상, 15명이 넘어야 배를 띄울 수 있단다.
환불도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규칙을 고수하는 뱃사공. 한참을 기다린 듯한 사람들은 실망감을 넘어 화를 내며 하나둘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단단한 어깨만큼이나 단호했다.
평일 한적한 호숫가, 빈 배에 남겨진 우리 둘, 그리고 낯선 외국인 여자 한 명.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초조함이 밀려오던 그때, 지나가던 중국인 여행객 넷이 사공과 흥정 끝에 배에 올랐다. 그러자 발길을 돌리려던 미국인 가족이 멈칫하며 고민에 빠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어서 타요! 이 아름다운 블레드 섬을 눈앞에 두고 그냥 가려고요?'
다행히 내 기도가 통했을까. 그들은 마지못해 탄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배에 올랐다. 드디어 정원이 채워졌다.
초록 물을 가르며 배가 출발했다. 성인 16명이 타서 묵직해진 배. 뱃사공이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노를 젓는다. 무동력으로, 오롯이 뱃사공의 어깨와 노 젓는 기술에 의지해 배는 나아갔다. 호수 중앙으로 나가자, 언덕에 가려졌던 눈 덮인 알프스가 나타났다. 탄성을 지른다. 닿을 듯 가까워 보였던 블레드 섬은 생각보다 멀었다.
뱃사공은 묵묵히 노를 저었다. 알프스 바람은 시원한데 사공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이제 사람들은 뱃사공에게 좀 미안하다.
배에서 내렸던 팀이 이번에는 그를 응원한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뱃사공에게 감사했다.
오직 전통 나룻배만을 이용하게 하고 어떠한 류의 동력선도 쓰지 못하게 한 이는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리지아 황후였다. 운행하는 나룻배 숫자까지 엄격하게 제한하는 대신 대대로 가업으로 보장해 준 그들의 특권은, 사실 자연을 향한 예의와 정직한 노동의 대가였다. 혹자는 그래서 뱃사공이 억대 연봉이상일 거라 한다.
대대로, 매일, 호숫가 선착장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섬을 오가는 직업이라니. 새삼, 무뚝뚝하고 탄탄한 뱃사공이 달리 보였다.
물 색이 어찌 이리도 곱고 신비로울까.
블레드 호수에는 동화 같은 전설이 있다. 오래전 이곳은 물이 없는 비옥한 초원이었고, 한가운데 작은 언덕은 밤이면 요정들의 춤터, 낮이면 목동들의 쉼터였다. 하지만 양 떼와 목동들이 요정들의 춤터를 돌보지 않자, 분노한 요정들은 산과 계곡의 물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초록 초원은 초록 호수가 되었고, 요정들이 춤추던 언덕만 물 위에 남아 지금의 블레드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름 자체는 밝은 빛깔이란 슬라브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호수물이 알프스 빙하가 녹아 에메랄드 빛이다.
블레드 섬에 내리면 아흔아홉 개의 돌계단이 우리를 기다린다. 신랑이 신부를 안고 계단을 오르다 종이 울리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는 전설이 있다.
섬에서 허락된 시간은 30분. 우리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하며 가볍게 계단을 올랐다. 정상에는 성모승천교회가 있다.
사랑의 나라답게 이 교회의 종에도 이야기가 전해진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파도바 부부였다. 강도를 만나 호수에서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기 위해 파도바에서 종을 만들어 보내려 했지만, 폭풍우에 배와 종이 함께 가라앉았다. 그 사연을 들은 교황이 새 종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종을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는 긴 줄에 놀라 교회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대신 섬을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건너편 절벽 위 블레드 성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며, 종이 울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말했다. 가족 한 명 한 명의 안녕과, 조용한 바람들을.
다시 배를 타고 선착장에 돌아오는 길, 이제는 친해진 사람들. 누군가 사운드 오브 뮤직 노래를 부른다.
뱃사공이 씩 웃는다.
호숫물에 손을 담가본다.
차갑다. 좋다.
초록 물을 거머쥐다가, 아이를 보았다.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을 바라보는 내 아이의 눈이 빛난다.
아, 지금 이 순간 참 좋다.
이대로 풍덩, 너의 호수로 빠져버리고 싶다.
우리는 블레드의 명물, 크렘나 레지나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고 호숫가를 산책했다. 오리들,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유유자적 산책…. 시간이 부족해 블레드 성을 오르지 못했지만, 호숫가의 시간도 충분히 좋았다.
돌아오는 버스.
“엄마는 안 아쉬워?”
아이의 큰 눈망울에 아쉬움이 그득하다.
사실 나는 풍경보다 창밖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네 옆모습이 더 좋았다.
너무 많은 풍경과 이야기들이 이어지자, 감동이 오히려 옅어졌달까.
나는 그저, 너랑 있어 좋았던 것 같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의 작고 따뜻한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이는 모든 걸 담아가려는 사람처럼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눈빛이 좋다.
세상이 환해지는 눈웃음도, 슬플 때 뚝뚝 떨어지는 눈물도. 양손을 모아 턱을 괴고 잠든 모습까지도.
나는 그런 너를 보며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제주 바다와 남태평양 바다들, 일본 온천과 고도들. 시애틀의 호수와 산, 그리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
여러 계절들, 수많은 웃음들. 그리고 오늘의 블레드까지.
이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시간을 함께 건넜다.
같이 다녀줘서, 정말 고마워.
행복했던 8일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이제 딸은 남쪽으로, 나는 북쪽으로 떠난다.
다음날 새벽, 잠이 덜 깬 딸을 꼭 껴안고 토닥였다. 공항까지 나를 데려갈 차를 기다리며, 널 혼자 두고 떠나는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져 불 꺼진 이층 방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나를 태운 차는 안개를 뚫고 깜깜한 고속도로를 씽씽 달렸다. 또 한 명의 승객이 없었다면… 아마 별별 상상을 다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 너머로 동이 터온다.
이제 나는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노르웨이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