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탐사일지 31화
트롬쇠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지난봄, 한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그곳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다가 오로라 이야기가 나왔다. 올해가 오로라 극대기라 작은 도시 트롬쇠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했다.
‘언젠가 나도 보고 싶다.’
막연했던 바람이 점점 또렷해졌다. 선배가 선뜻 집으로 초대했다. 덕분에 나는 혹독한 물가를 자랑하는 트롬쇠에서 숙소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도착 며칠 전부터 선배는 걱정이 많았다. 내가 머무는 동안 비 예보가 가득하니, 혹시 오로라를 보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오로라.
천운이 따라야 한다면, 이제는 내 운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북동쪽으로, 더 북쪽으로 올라가던 네 시간의 비행.
새벽부터 설친 잠에 잠깐 눈을 붙였다 뜨니 창밖은 어느새 북해였다. 구름 사이로 블루 그레이 빛 바다가 잔잔히 일렁였다.
그때였다.
보석을 흩뿌린 듯한 작은 해안 도시가 스쳐 지나갔다. 베르겐일까. 아니, 그곳은 서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
수년 전, 오슬로에서 베르겐까지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피오르를 건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아래 어딘가, 내가 지나쳐온 발자국들이 남아 있을까.
이내 세상은 온통 검푸른 산들의 행렬로 바뀌었다. 깎아지른 듯한 피오르의 등줄기마다 하얀 잔설이 내려앉아 있었다. 문명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거대한 자연의 침묵이 들어차 있었다. 마을도, 도로도, 철도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위산과 빙하 호수들. 나는 비로소 내가 북극권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스라한 태양에게 마음속 메시지를 보낸다.
‘바람아 불어라. 태양풍아 어서 오너라. 내가 간다!’
섬과 섬을 잇는 긴 다리와 아담한 바닷가 공항. 택시 기사는 이틀 전 시내에서 찍었다며 선명한 오로라 사진을 보여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행운을 빌어주는 그의 인사를 뒤로하고 선배의 집에 도착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밖으론 오렌지빛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손수 담근 겉절이와 미역국으로 차려진 푸짐한 저녁 식사 끝에 선배가 말했다.
"달이 떴어요. 오늘은 비가 안 오려나 봐. 나갈까요?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신이 나서 밤산책을 나섰다. 예술 극장과 폴라리아 수족관을 지나 대형 유람선 선착장에 닿았다. 탁 트인 하늘 왼쪽으로 멋진 다리가 지나가고 건너편 불빛들이 일렁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바닷가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로라 앱을 깔았다. 지수(KP-Index)는 3. 높지는 않지만 나타나기만 하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수치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면 속 숫자가 하나씩 낮아졌다. 희망도 그만큼 조용히 식어갔다.
어느새 밤 10시.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하는 선배를 생각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선배는 오로라를 보러 주로 어디로 가요?"
"어? 실은 어딜 따로 가 본 적은 없어요. 그냥 아무 때나, 보이면 보는 거지."
아, 그렇구나. 이곳 사람들에게 오로라는 '찾아 헤매는 기적'이 아니라 '문득 마주하는 일상'이구나. 10월 초의 밤바람은 서늘했다.
그 밤, 오로라 앱을 붙잡고 궁싯대던 나는 사주까지 검색해 보았다. 나의 대운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토(土)와 화(火)가 많은 나는 촛불 같은 별빛이라 했다. 나무가 많은 트롬쇠에서 편안해질 것이며, 내가 오로라를 본다면 그것은 '빛과 빛이 만나는 찰나'가 될 거라고.
언제부턴가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이 세계가 아닌, 내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창작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멈추지 말라는 조언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를 만드는 일에만 익숙한 나에게, 빛을 보리라는 보장 없는 글쓰기는 막막한 일이었다. 좋아해서 시작해 놓고선, 잘할 수 없는 일에 빠져들어 헛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대도 나는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
그 미래를 안다면 달라질까.
멈추지 않는 한 무위는 아닐 거라고, 무언가에 지독하게 빠졌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여전히 발밑은 허공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 길이 맞다는 신호를,
내 등을 밀어줄 어떤 징조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밤, 나는 오로라에 내 글쓰기의 운명을 걸었다.
오로라가 마치 미래를 비추는 팔란티르 구슬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 길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배수진을 쳤다.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억지인 줄 알면서도, 왠지 그 답을 확인하러 여기까지 온 것만 같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간절히 빌었다.
"오로라를 꼭 보게 해 주세요. 내가 이 길을 놓지 않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