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헌터의 밤

지구별 탐사일지 32화

by Stardust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환했다. 밤새 트롬쇠를 비추던 보름달이 아침의 태양에게 자리를 내준 뒤였다. 선배가 출근하는 기척도 못 듣고 단잠에 빠진 사이, 조용한 아파트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벼운 아침을 먹고 나선 시내, 잠깐 파란 하늘을 비추더니 이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낮게 깔린 구름 아래, 줄지어 선 노란 은행나무들도 빛을 잃고 찌꾸르르한 색을 띠었다. 하지만 지붕선이 독특한 구시가지의 목조 건물들은 그 자체로 정겨웠다. 샵마다 순록 문양의 스웨터와 트롤 인형, 그리고 오로라 기념품들이 넘쳐났다. 삼십 분쯤 어슬렁거리니 이 작은 도시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날씨만 빼면 모든 게 완벽했다.



길모퉁이 노란 목조 건물의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남부 유럽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세련된 커피 맛이었다. 유리창에 툭툭.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카페는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선배도 우산은 가지고 나갔냐며 걱정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날씨 앱은 더 우울했다. 앞으로 머무는 내내 강한 비 예보였다. 그나마 오늘이 나아 보였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나는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 오로라 투어를 신청했다.

"오늘 밤 당장이요."

유서 깊은, 트롬쇠 현지인 가족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추천받았다. 3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지만, 오로라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까울까.

선택은 끝났다. 이제는 하늘의 차례였다.

데이비드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호주에서 온 노부부와 칠레 청년, 그리고 나. 단출한 구성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멀어지자 장엄한 산과 피오르, 북극의 침묵이 우리를 에워쌌다. 데이비드는 밝은 눈으로 숲 속의 순록을 찾아냈지만, 내 눈엔 그저 어둠 속의 흐릿한 윤곽일 뿐이었다.


차 안의 라이브 카메라는 쉴 새 없이 하늘을 스캔했다. Kp 지수는 4. 지표는 좋았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나는 데이비드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스몰 토크를 나누었다. 97년 슬로바키아 출장의 기억을 소환해 보았지만, 그는 당시 너무 어렸고 나는 그곳의 최근 소식을 몰랐다.

그러다 그가 툭 던진 한마디.

"어제는 결국 오로라를 보지 못했어."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5일이 남아있으니까.



두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링바쇠르(Ringvassøy) 섬의 바닷가 마을. 북위 71.5도였다. 밤이라 풍경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둥근 돌이 깔린 해변 너머 잔잔한 바다와 통나무로 만든 선착장, 풀짚 지붕을 가진 오두막이 정겨운 곳이었다. 구글앱에서 찾아보니 오두막 주변에 양떼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칠레 청년은 차에서 쿨쿨 자고 호주 부부는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 나는 나무 데크 앞에 휴대폰용 삼각대를 설치했다. 데이비드는 모닥불을 피우고 의자와 담요를 내놓고 간식 테이블을 차렸다. 바닷가 모닥불에 어울리는 마시멜로, 핫초코, 커피, 사슴스프, 소시지가 있었다.



데이비드가 구운 마시멜로와 핫초코를 권하며 말했다.


"오로라 투어는 '체이싱 오로라'가 아니라

‘체이싱 스카이(Chasing SKY)'예요. 태양풍이 불어오는 날이라면 오로라는 이미 저 하늘 위 모든 곳에 동시에 내려와 있죠.

우리가 사냥해야 할 건 오로라 자체가 아니라, 그걸 보게 해 줄 투명하고 맑은 하늘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깨끗한 하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의 절반인 셈이다.


데이비드는 오로라를 꼬박꼬박 '노던 라이츠(Northern Lights)'라 불렀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지구 자기장과 마찰하며 내는 빛. 과학은 명쾌했지만, 이 척박한 극지방에서 마주하는 자연 현상은 그저 웅장하고 거침없는 신비였다.


백발의 호주 노부부는 이틀 전 트론헤임 산책길에 마주했다는 오로라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게도 저런 순간이 허락될까.

칠레 청년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고, 나는 사슴 수프를 도전해 보았다. 담백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숲의 나무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방한 부츠를 신고 모닥불 옆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자 으스스하던 한기가 가셨다.


바닷가 돌무더기 위로 삼각대가 세워졌다. 오두막 옆 시냇물 소리가 졸졸 들려왔고, 모닥불의 탄내와 젖은 풀짚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들었다.



그때였다. 데이비드가 짧고 강렬하게 소리쳤다.


"나타났어요!"


처음엔 회색빛 구름인 줄 알았다. 가이드는 그것을 '베이비 오로라'라고 불렀다.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

호주 아저씨의 카메라 화면 속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가느다란 초록 뱀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맨눈으로는 구름과 구별조차 힘든 미약한 빛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시작이었다.



신비로운 밤이 열리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 위로 별들이 반짝였고, 둥근달은 산 너머로 천천히 기울어갔다. 나는 망원경이라도 된 듯 핸드폰을 높이 들고 하늘 구석구석을 훑었다. 우리는 모두 북극을 향해 목을 길게 뺀 채, 태양에서 불어온 바람이 어서 이곳에 닿기를 기다렸다.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북극 하늘은 완벽하게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