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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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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단실 Nov 19. 2024

나의 서울 (1) 잠실 주공

서울로 상경한 이후 내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송파구에 위치한 열세 평 남짓의 주공아파트에서 만들어졌다. 잠실 주공아파트 1단지 14동 502호는 모자란 기술로 급하게 시공한 티가 팍팍 나는 낡은 전세 아파트였지만, 부모님, 나와 동생, 그리고 이모와 외삼촌까지, 6명의 식구가 적어도 서울에 발을 디디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집이기도 했다.

그때 주공아파트는 우리 가족처럼 어린 자식을 낀 젊은 가정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아직도 민서니, 숭권이니 하는 동갑내기 동네 친구들의 이름이 생각난다. 안전 규제로 인해 이제는 보지 못할 높은 미끄럼틀과 녹슨 정글짐을 울면서 오르던 우리가 뿔뿔이 흩어진 것은 내가 일곱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잠실 주공1단지는 재개발 대상이 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었고, 민서의 집 문에 가장 먼저 붉은 스프레이로 그려진 X자가 새겨졌다. 숭권이는 성남으로 이사갔던가…

14동을 거의 가장 마지막에 떠나던 우리는 가락 시영아파트로 이사했다. 비워진 주공아파트를 나오며 나는 아버지께 “우리 아파트가 다시 만들어지면 꼭 1단지로 다시 돌아오자”고 말했고, 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다. 시영아파트로 옮긴지 1년이 좀 안돼서 우리는 같은 이유로 한번 더 이사를 해야 했고, 지금 재개발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잠실 주공 5단지로 옮긴 뒤 집안 사정이 좋아져서 운 좋게도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까 거의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아온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기숙사에서 살았으면서도 내가 “집”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늘 서울의 아파트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가 꼭 닭장 같고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사실 아파트야말로 가장 인본주의적인 건축물이다. 문화와 사회적 기반시설이 집중된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많은 사람들이 누릴수 있는 집약적인 주거형태이면서도, 아파트 내에 공원과 광장 등의 녹지를 확보하기까지 한다. 5층 남짓한 낡은 플랏(flat)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런던과 미국 동부의 주거환경에 비교하면 월등한 수준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회색 아파트 숲속에서의 삶에 낭만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전기, 수도, 가스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소형-중형 평수의 집을 수천 수만 가구에게 공급할 수 있다는 것, 수만명을 대도시에 살수 있게 하는 것만큼 낭만적인 기적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을 담는 아파트의 낭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최상위 부자들을 위한 대형 아파트와 주상복합,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오피스텔들은 꾸준히 공급되고 있으나, 갓 가정을 차린 30대 직장인들은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일을 꿈꾸기조차 힘들다. 나의 가족이 주공 1단지와 가락 시영 아파트를 떠나오던 것이 각각 13년, 14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13평짜리 잠실 주공 1단지 아파트에는 엘스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이 붙은 18억짜리 아파트가 되었고, 17평짜리 가락시영 아파트는 헬리오시티라는 이름으로 재건축되어 18평형 아파트가 10억원 가량에 팔리고 있다. 그간 서울에서 살아가는게 얼마나 더 비싸졌는지를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께서 잠실 주공1단지 재건축이 끝나면 꼭 돌아오자는 나의 부탁을 아직까지 들어주지 못한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십수년 전, 아직 젊던 부모님, 꿈을 품고 언니/누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외삼촌과 이모, 여섯살 먹은 나와 갓난 동생이 2019년 현재에 나타난다면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예전의 우리 부모님처럼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젊은 부부들은 여전히 지천이지만, 우리 가족이 서울에 발을 딛고 살게 해준 그 아파트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쯤 주공 1단지로 돌아갈수 있나?

2019.10.12


이 글을 쓴 지 꼭 5년이 다 되었다. 잠실 주공 1단지 아파트는 이제 18억이 아니라 25억이고 가락시영 아파트는 12억이다. 나는 여전히 주공 1단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202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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