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인류학자 Mar 04. 2020

엄마의 시간

큰 아이가 두세 살일 때 남편은 주말이 되면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나가려고 했다. 한 주 내내 집에서만 있었을 나에게 바깥바람을 쐐 주려고 그랬다. 아이 젖도 먹여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야 하기에 보통 몰이나 백화점을 갔다. 하루는 커피숍을 지나면서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도 흔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광경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거다. 커피숍에 앉아, 그것도 화려한 머리에 액세서리와 하이힐의 차림으로 그 시간에 커피숍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제 나에겐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니다. 아주 드물고 아주 특별한 일이 되었다. 그때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했던 혼자만의 자유가 이제는 이젠 낯설기까지 하다.  친구들끼리 길을 걷는 모습만 봐도 그런 생경함을 느낀다. 


 엄마가 되고 나서 시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둘째 아이가 잠투정이 심했다. 8시에 잠이 들어도 11시까지 7~8번은 깼다. 그럴 때마다 어린 첫째 아이를 두고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재워야 했다. 내가 잠든 이후에도 새벽 2시, 5시에 다시 잠이 깨서는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반을 울고 보채다 잠이 들었다. 어떤 때는 달래지지 않아 불을 켜고 휴대폰을 보여주며 잠을 깨워 울음을 달래고 다시 재운 날도 많았다. 그렇게 나는 퇴근 없는 육아를 했다. 그랬던 아이가 18개월이 되자 자주 깨는 일이 많이 줄었다. 두 아이가 잠이 들면 이제 하루가 '대충' 끝이 났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새벽에 한두 번 깨서 보채긴 하지만 그래도 첫째가 잠든 9시부터 둘째가 다시 깨는 새벽까지는 아무에게도 구해 받지 않는 내 시간이 생긴 것이다. 10시 즈음 집안 정리를 끝내고 나면 그제야 퇴근한 남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11시부터 2~3시까지 올빼미 생활을 시작했다. 너어어어무 행복했다. 살 것 같았다. 그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영적인 충만감을 느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를 찾는 느낌이었다. 묵상, 독서, 글쓰기. 예전에는 그렇게 해야겠다 다짐하고도 다른 일들 뒤로 밀리며 잘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 보낸 그 많은 자유의 시간들이 아른거린다. 4시 40분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12시에 잠들기까지 그게 모두 나의 시간이었는데, 그때 대체 뭐했지? 친구랑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수다를 떨고, 방안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서핑을 하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긴 자유의 시간 조각들이 꿰어져 어떤 무늬도 리듬도 만들지 못했는지, 기억의 조각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 다닌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어쨌든 자유에 대한 지나친 갈망으로, 새벽 2~3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보냈던 날이 2~3달이 지속되자  마침내 탈이 났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짜증도 냈지만, 예전과 다른 수위의 분노가 나타났다. 저 심연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찌든 짜증과 분노를 그 어리고 여린 둘째 아이에게 소리쳐 쏟아내는 나를 보았다. '이건 미친 거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정신과에 가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난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나름 자부하며 살았다. 그런 나를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지점이 엄마로 살면서 밑바닥을 친 순간인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한 정신과 의사의 유튜브 채널을 보았다. 정신과에 오는 사람에게 먼저 체크하는 게 있는데,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는지, 운동은 잘하는지이다. 이걸 바로 잡고도 문제가 계속되면 다시 오라고 하는데 대부분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내가 미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잠이었다. 그 뒤로 하루 7시간 수면을 꼭 지키려고 한다.  

2020년 새해부터는 아이들과 함께 잠들고 4시 반에 일어난다. 7시간 수면을 지키면서 밤에 내 시간을 지켜내기가 어렵다. 육퇴를 한 엄마들과 카톡을 하다가, 퇴근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어느새 새벽 2시를 찍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4시 반 기상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매일의 3시간.
그동안 엄마로 산 시간 동안의 경험, 감정, 생각을 모두 쏟아내고 싶다. 그게 말이 아닌 글이 될 때 무게를 갖기에, 향기를 갖기에 그 글을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도 글로 쏟아내고 싶다. 안 그러면 말 많은 예비역이 되고 말 거다. 그 이야기 중 어떤 것은 동화로,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은 소망도 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크지만, 시작은 해 봐야겠다. 화요일에는 그림을 그리러 작업실에 가고, 수요일에는 독서교육 강좌도 듣게 됐는데, 이 시간의 조각들이 이제는 어떤 무늬를 만들 것 같은 예감이다.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는 2020년. 드디어 내 세상이 열렸다~~~~ 야호!!!!

매거진의 이전글 밥을 안 먹으면 간식을 주지 말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