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以貫之(일이관지) - 언어는 다르지만 같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훈민정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룬 영화지요. 이 영화 개봉 이후에 여러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다. 불교와의 관련성은 없다는 리뷰들이 끊임없이 달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훈민정음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냐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말소리였습니다. 당연히 언어는 변화합니다. 문법에서는 언어의 역사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글자를 본적이 많으시겠죠? 한 번쯤 읽으려고 도전해 보았던 경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읽을 수 있으신가요? 이 글을 보면 글자의 변화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오늘날과 글자, 즉 표기하는 방법이 달랐다는 것은 소리도 달랐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발음으로 ‘일곱 꽃으로 인하여 미더운 맹세가 깊으시므로 세상마다 아내가 되시니 다섯 꿈으로 인하여 수기가 밝으시므로 오늘날에 세존이 되시니’처럼 읽어나간다면 과연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알아들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즉 현대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가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의사소통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어의 역사성, 즉 시간에 따라 언어가 변화한다는 이 성질은 왜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요즘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정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절대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말의 나이와 비교한다면 이 나이는 너무나 짧은 것이지요.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트에 따른다면 우리 언어의 시작은 약 4000년 전. 우리 언어의 나이에 비한다면 우리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80년 정도의 시간은 언어의 나이 1살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런 짧은 시간 속에서 언어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은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새로운 말도 생기고 다양한 매체의 영향으로 언어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국어 전체의 역사로 봤을 때는 아주 미미한 것이지요.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언어는 왜 변화하는 것일까요? 바로 자의성이라는 성질 때문이랍니다.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와 형식이 필연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띄는 무언가의 이름은 반드시 그 이름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부모가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이름을 짓는 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수많은 고민 끝에 여러 이름의 후보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들 중에 하나를 고를 것입니다. 물론 깊은 고민과 달리 누군가의 권유로 갑자기 이름이 정해질 수도 있겠죠. 우리의 이름이 지금의 이름이 아니었을 수 있듯,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반드시 그 말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란 정해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의 특성에 관련된 고전적인 예로 스위스 작가 피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가 있습니다.
"아침에 그 늙은 남자는 오랫동안 그림 속에 누워있었다. 아홉 시가 되자 사진첩이 울렸다. 그 남자는 일어나서는, 발이 시리지 않도록 깔아놓은 장롱 위에 섰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신문에서 옷가지를 꺼내어서는 그것을 걸쳐 입고는 벽에 걸린 의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양탄자 옆의 자명종에 앉아서 거울을 꼼꼼히 넘겨보다가 마침내 거기에서 그의 어머니의 책상을 발견하였다."
-피터 빅셀,「책상은 책상이다」 중
현대소설임이 분명한데 국어나 문학 교과서가 아닌 문법 교과서에 늘 수록되는, 어쩌면 작품의 의도와는 달리 사용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작품에서 온통 회색 옷을 걸치고 있는 늙은 남자는 변화 없는 자신의 삶에 분노를 느끼고 사물들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온통 자신만의 법칙으로 소통하려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회색의 남자와 다른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할 수 없게 되고 주인공은 침묵하게 되지요. 아마 이 작품은 사람들 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작품일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름이라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정해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명종을 사진첩이라고 부르고, 양탄자를 장롱이라 부르며, 장롱을 신문이라 부른다면 이 남자는 침묵하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바로 이것이 언어의 사회성입니다. 사물의 명칭, 사람의 이름, 우리가 말하는 모든 언어는 모든 사람들이 약속을 한 결과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저것은 우유고, 이것은 과자이며,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숟가락임을 배워가는 이 과정이 언어 습득이라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약속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약속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언어의 사회성입니다. 물론 사회성이라는 말속에는 굳어진 약속은 개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회색 옷의 사내는 이것을 간과한 것이지요.
예전 일이기는 하지만 말 때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과 후 학교 수업을 듣지 않고 일찍 학교를 나가봐야 할 것 같다는 학생의 말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죠. 그랬더니 그 학생이 ‘문상받으러 문복 가야 해요.’라고 말하더군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참으로 다양한 상상을 했습니다. ‘문상(聞喪)? 누가 돌아가셨나? 문상을 어떻게 받지? 문복(問卜)? 점을 치러 가나?’
지역문화복지센터에서 활동을 하며 그 결과가 좋아 문화상품권을 받으러 간다는 내용을 ‘문상받으러 문복 간다.’는 짧은 말로 했으니 간결한 표현의 정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언어의 사회성을 가르치다 보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Nothing endures but change(변화한다는 것 외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뜻이고,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약속인 이 사회성도 예외는 아닙니다. 엄격하고 불변할 것만 같았던 그 약속이 변하는 것. 바로 앞에서 다룬 언어의 역사성입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새로운 물건이 발명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회 제도도 마련되기도 하고, 다른 언어의 유입이 있을 수도 있기에 새로운 말이 생기면서 예전의 말들과 경쟁하고 경쟁의 승자가 남아 새로운 언어가 형성됩니다. 즉 오랜 시간의 흐름이 사회적 약속도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대상과 어떤 언어의 자의적 결합이라고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제 언어의 추상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추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그림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추상화는 영어로 Abstract Painting이고 한자로 쓰면 抽象畵라고 쓸 수 있지요. Abstract는 ‘추상적인’이라는 의미와 ‘추출하다, 끌어내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抽象이라는 말은 뽑아낸다는 의미의 추(抽)와 모양의 의미를 갖는 상(象)이 결합한 말입니다. 결국 두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어떤 대상에서 무언가를 뽑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의 추상성 역시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구체적인 대상 속에서 속성만 뽑아내어 화폭에 옮긴 추상화처럼, 언어의 추상성 역시 어떤 대상을 그대로 언어로 전달하지 않고 대상의 공통적인 속성을 뽑아내어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떠올려 볼까요? 어떤 나무를 떠올리셨나요? 아주 키가 커서 하늘의 구름도 걸리게 할 만한 나무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집안에 키우는 작은 화분에 새싹 같은 나무를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상 속의 나무는 무성한 잎사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아니면 앙상한 가지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매가 달려 있는 나무, 꽃이 피어 있는 나무. 수많은 나무를 사람들은 떠올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나무를 떠올린 것입니다. 즉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특정 대상을 하나의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는 수많은 대상의 공통점을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에 따라 대상에 언어를 부여하는 과정, 즉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도토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 열매의 총칭이라고 나옵니다.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는 굴참나무, 물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있고 결국 이 나무들이 맺는 열매들은 모두 도토리가 됩니다. 다 생긴 모양이 다른 도토리지만 다 같은 도토리인 샘입니다. 나무 떠올리기와 도토리를 통해 언어의 추상성을 기억하시면 될듯합니다. 언어의 추상성이 대상의 공통적인 속성을 뽑아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면 공통적인 속성을 뽑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네 맞습니다. 공통적이라는 말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대상은 필요하겠죠. 세상에는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고 여러분들의 이름이죠. 다시 말해 고유명사는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분절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까요? 분절이라는 말은 마디마디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언어와 분절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의 말과 글은 쪼개고 또 쪼갤 수 있습니다. 하나의 큰 글은 그보다 작은 문단으로 나누어지고 하나의 문단은 여러 문장으로 나눌 수 있지요. 하나의 문장으로 띄어쓰기의 단위와 일치하는 어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누다 보면 ㄱ, ㄴ, ㅏ, ㅓ 같은 각각의 소리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나눈 마지막 결과물인 ㄱ, ㄴ, ㅏ, ㅓ와 같은 자음과 모음들을 음운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언어는 분절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을 펼쳐보시죠. 손바닥과 손가락을 나누는 그 지점을 찾아보세요. 오늘 손바닥과 손가락을 나누는 지점에 잘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선을 그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일 손바닥과 손가락을 나누는 그 지점에 다시 선을 그어본다면 과연 정확하게 일치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수업을 하면 ‘나는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무지개 사진을 놓고 빨주노초파남보를 구분하여 보신다면 어떨까요? 하나의 사진이지만 구분하는 사람마다 그 선은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자연을 끊어서 즉, 분절하여 표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이제까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몇몇 특징들은 살펴보았는데 이 이외에도 여러 특징들이 더 있기도 합니다. 어떠신가요? 아마 언어에 대해 그저 말하고 쓰는 행위의 수단 정도로 보았던 관점에서 새로운 분석적인 시각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