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정수기회사여.

쏙'집어 라오

by 별이라오

물을 물 쓰듯 해보았는가.


1.5리터 생수 물을 한통, 한통씩 까가며 채소도 헹구고 밥도 짓고 찌개도 끓여본 적이 일생 없었다. 라오스에 와서는 요리 한번 하고 돌아보면 준비한 반찬 가짓수보다 더 쌓여있는 빈 플라스틱 통 앞에 고해성사라도 해야 될 판이다

.

물먹는 하마가 냄비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건지, 어느 날 국이라도 한번 끓이려 하면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는 것 같아 물병 뚜껑 열다가 정말 내 '뚜껑'이 열릴 지경이다.


석회질이 많다는 라오스 수돗물은 세신하고 세차하고 설거지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식수로는 보통 생수를 사서 먹는다.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 그릇만 가져다 대면 원하는 온도의 물과 얼음까지 쏟아져 나오던 정수기는 단연 주방 최고의 똑똑한 보조셰프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믿을 수 있는 정수기가 라오스에도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라마다의 다른 조건과 환경 등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은 쉬운 일이 아닌 눈치다.

나의 선택은 20리터짜리 큰 물통이다. 이 물 회사를 소개해주신 집주인분 덕분에 이 물, 저 물 돌고 돌던 물 유목민 생활을 마쳤다.

20리터짜리 큰통 물


문제는 크고 무거운 통의 물을 따라낼 때마다 물통과 힘겨루기를 해야 한다는 거다. 조금이라도 힘조절에 실패하면 안 그래도 귀한 물로 라오스 햇볕에 타들어간 걸레들 갈증만 풀어주는 꼴이 된다. 또한 매번 치열했던 싸움의 잔해마냥 여기저기 튀고 떨어진, 땀인지 피인지 모를 귀한 물들을 닦아내는 뒷정리도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라오스에서 알고 지내게 된 지인분의 초대로 그분의 집을 방문했다. 집의 인테리어나 먹음직스러운 한국 음식보다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바로 그 집의 팔자 좋아 보이는 큰 물통이었다.

똑같은 20리터 큰물통이 가볍게 시소를 타고 있는 거였다. 내 주방은 씨름 현장인데 이곳은 놀이공원이다. "꺅!" 함성을 지를 뻔한 내 호들갑을 꾹 누르며 점잖게 "오!" 했다.

며칠 뒤 우리 부부를 초대해 주셨던 지인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라오스에 온 환영의 선물로 물통 시소를 주문했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었다! 그날 물통 시소 앞에서 신기해하며 요리조리 살펴보던 내 모습에 마음을 써주신 거다.

당시 라오스 적응 초초기라서 물건들을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하는지 감도 안 서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문제작하는 물통 시소 선물은 마치 오아시스.


이제 내 주방도 놀이동산이다. 꺅!!!

시소타는 우리집 물통

한국에서 정수기로 물을 쭉쭉 뽑아쓰면서는 하루, 한 달 얼마나 많은 물을 소비하고 있는지 모르고 살았던걸 깨닫게 된 것도 물통 시소를 태워주면 서다. 정수기 같은 간편함은 없지만 시소 한번 태울 때마다 감사함이 그릇에 물보다 가득 찬다.

딸의 학교는 물을 가지고 다니거나 생수를 매점에서 사 먹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나는 아침마다 딸의 보냉통에 물을 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무더위를 식혀줄 얼음도 함께 넣어주는데 얼음 정수기가 없다 보니 냉동실은 매일 얼음틀과 열일 중이다.

얼음정수기의 스피드는 따라갈 수 없지만 얼음틀에 고소한 보릿물, 작두콩물을 종류대로 끓이고 식히고 부어 얼음을 만든다. 보릿물에 보릿물 얼음, 작두콩물에 작두콩 얼음이다 보니 물도 싱거워지지 않고 운동하다가 고소하고 시원한 얼음을 먹으며 딸이 조금은 더 맛있는 기분을 삼킨다.


'빨리빨리'보다는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 더 많은 이곳 라오스는 스피디하고 스마트한 내 나라와는 또 달라서 분명히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이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이다.


그렇게 불쑥불쑥 브레이크가 되어주는 불편함들은 내게 멈춰서 생각이란 걸 하도록 부지런히도 일해오고 있다.

어쩌면 '느리다.'는 말은 '누리다'는 말과 같고 스마트한 장비들이 없는 때가 비로소 내 생각들이 스마트하게 일할 때라는 것을 잊을까 봐 부지런히도.


그렇게 나는 느림의 미학과 낭만과 똑똑해질 기회들을 잘 버무려서 살고 있다. 그래도 이 이민자 큰 소리로 외쳐본다.

"라오스는 정수기의 시ㅡ퍼런 블루오션!!!




*한 줄 첨가*

라오스에도 정수기를 사용하는 가정, 레스토랑 등이 있기도 하다. 다만 필터인증 관리환경 등을 고려해서 선택하는 건 저마다의 몫인 것 같다.

옆나라 태국에는 우리나라의 정수기 회사가 들어가 있다. 아마 시장성에서 라오스는 아직이었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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