쏙'집어 라오.
‘띠리링-띵띠리링'
마침 전화가 울린다.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걱정하던 친한 언니의 전화였다.
“기름 넣느라 새벽부터 고생하는데 기름 더 태우며 다니지 말고 오늘은 나랑 다녀. 내 차에는 아직 기름이 여유 있어. 물류 찾으러도 내가 데려다줄게 그리고 같이 장도 보자.”
마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염치 불구하고 일단 찔끔 목만 겨우 축인 내 차를 달래 언니집으로 돌렸다.(다행히 집이 5분 거리다.) 오늘 한국에서 배로 도착한 물류도 찾으러 가야 하고 장도 봐야 하고 기름 태울 일이 태산이었다.
“웃기지 마러-.”
언니를 만나서 간단히 계획을 세우고, 이 전쟁 같은 시국에 언니 차의 기름을 태우며 다녀야 하니 밥은 내가 사겠다고 말하는데 그런 소리 말라며 ‘웃김’ 금지령이다.
항상 섬기고 나누는 일을 계산스럽게 하는 분이 아니어서 배울 점도 많은 언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어쩜 그렇게 지인들의 위기나 문제의 때에 원더우먼 같을 수 있는지 요즘 집중관찰 중이다.
겨우 커피 하나로 언니에게 고마움을 전달하고 함께 마트로 향했다.
‘대비를 하되 과하지 않게 사둬야지.’
주유난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차량을 사용할 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생필품을 준비해 두려고 나온 거다. 물론 최악의 순간이 온다면 걸어서라도 빈 캐리어를 끌고 중간 지점에서 접선해 장 보러 가자고 아는 언니들과 의기투합도 마친 상태이다.
오일난이 지속되면 공산품을 거의 수입에 의지하는 라오스의 특성상 물건들의 가격이 오르는 수순을 밟을 것은 불 보듯 뻔한데 더 큰 문제는 수입 자체가 지연되거나 막히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그전에 전쟁이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장한 마음으로 마트 구역 구역을 누비는데 저 앞에 ‘해결사’가 장을 보고 있는 것이 내 레이더망에 걸려왔다. ‘해결사’라 함은 이 땅 라오스에서 이러저러한 문제나 어려움을 나눴을 때 ‘해결책’을 안겨주시는 선생님들이시다.
반가운 마음에 구조신호를 날리기라도 하듯 양손을 높이 들어 선생님을 향해 힘껏 흔들어 댔다.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신다.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주유난 때문에 요즘 뵙자고도 못하고 있었어요.”
“네, 안 그래도 저희는 해외에 일 때문에 나갔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라오스가 이 정도로 주유난이 심한지 몰랐지 뭐예요. 일요일에 4군데나 다니면서 겨우 주유했어요.”
“으... 선생님도 고생하셨네요."
주유난이 잦아들면 다시 편하게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고 비상식량과 비상용품이 될지도 모를 녀석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까똑!’
‘해결사’님이다. 지금 라오스에서 주유를 그나마 수월하게, 쏭쎈(약 14,000원)보다는 많이 해주는 주유소 위치를 찍어 보내오셨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잠도 잘만큼 자고 다녀오라는 안정제 한마디도 잊지 않으셨다. '역시 해결사!'
인터넷으로 주유소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설 준비도 마쳤다. 그래도 난리통에 경험해 봤다고 뭔가 순조롭고 여유롭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니 더 편안하다. 약 10여분을 달려서 주유소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대기줄이 길다. ‘그래도 대형 주유소이니까.’ 긴장을 달랬다.
‘직원에게 우리나라 돈으로는 만원 조금 안되게 쥐어주고 더 넣어달라면 넣어준다더라.’
요즘 심심치 않게 들었던 유혹의 맨트다. 주유소 앞에서 열두 번도 더 유혹에 빠졌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더랬다. 이번 위기 앞에 양심과 이타심이 꽤나 걸리적거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평소 라오스에서 돈을 요구하는 길거리의 어느 경찰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라 부추기는 몇몇 혹은 많은 라오스의 문제들을 겪으면서 반대로 아무리 고마운 일을 겪더라도 현금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노력해 왔던 터라 지금 차에 앉아있는 나는 홀로 싸움 중인 고독한 다중이다.
드넓고 주유기도 여러 대인 이곳은 입구부터 배치되어 있는 직원이 창문을 통해 휘발유를 넣는 차인지 디젤을 넣는 차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안내해 준다. 게다가 내 차는 주유구가 오른쪽이라고 말을 하니 바로 우측용 주유기 쪽으로 나를 따라오라며 손을 까딱여준다. 저 까딱임이 원래 이토록 반가운 제스처이었던가?!ㅎㅎ
텅텅 비어있는 우측용 주유기를 보니 그동안 좌측 주유기만 열고 주유를 해주던 주유소에서 뒤에 대기하는 다른 차들 눈치 속에 차를 낑낑 한 바퀴 돌려 엉덩이부터 들이밀어야 했던 설움을 신은 주목하셨던 것이리라!
“싸바이디~(안녕하세요), 하센 다이버?(50만 낍/약 35,000원 가능한가요?)”
직원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은 진작에 접어두고 아주 정중하고 부드럽게 직원을 향해 부탁의 말씀을 올려드리던 참이다. 직원이 묘하게 웃더니 가능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 음... 혹센 다이버?(60만 낍/약 42,000원)”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비굴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제발, 제발! 된다고 말해줘! 제발!'
직원의 입술만 보인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드디어 직원의 입술이 움직인다. 슬로우 모션으로 “다~아~이(가~능~합~니~다)”가 플레이되는 것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 기쁨에 나는 “짜오 쏙디~쏙디!(행복하세요!)”를 직원에게 연발 내뱉으며 고마운 마음을 마구 날려주었다.
돈을 쥐어주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룬 승리감에 내 머리를 종일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돌아보니 주유도전을 하던 날 내가 싸워야 했던 진짜 상대는 어쩌면 더위도 아니었고 주유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아니었다.
그건 주유소 대란통에 무질서한 사람들과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주유소 관계자들 속에서 줄도 설 줄 모른다며 라오스를 책잡고 잘난 체하려는 내 속내와의 싸움이었고
이런 상황에 뭔가 더 세련되고 엘리트 하게, 돌아갈 것 같은(상황에 몰려서 더 극으로 만들어진 지극히 개인적 생각.) 내 나라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나는 타국살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상대해야 했던 이 전쟁의 진짜 상대였다.
그리고 분명한 건 그날, 모두가 똑같이 불안했고 살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의 전쟁 소식이 퍼지던 초반에는 모두가 더 불확실한 오늘과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더 몰려들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서로가 알고 있다. 너도 나도 급하지만 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모두가 같은 처지임에 위안을 받고 있다는 것도.
끝으로 덧붙이자면,
내가 돈을 쥐어주지 않고도 주유를 더 넉넉히 넣은 그 주유소는 알고 보니 100만 낍(원화 약 70,000원)까지도 넣어주는 곳이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해결하지 말라고 부단히 경고음을 울려준 내 양심에게 경의를 표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끝끝내 주유를 완수하는 승전고를 울린 어쩌면 외로운 병사였던 나에게 받친다.
"깽 라이~!!!"
*깽라이(ເກັ່ງຫຼາຍ):잘했어!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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