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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Nov 19. 2018

'흑백'의 세상, '선악'의 근원

영화 <영주>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영화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영주>는 시종일관 무거움을 잔뜩 안고 있었다. 피식 웃을 수 있는, 혹은 눈물 흘릴 수 있는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보고 있는 내 마음은 점점 답답하게 조여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영주>를 보고 나온 이 마음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조금씩 조였던 매듭을 풀어주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조여오는 것 같았다. <영주>는 그렇게 현실의 씁쓸함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담아낸 현실 농도 100%의 영화지만 신기하게도 현실의 농도가 100% 이기에 더 씁쓸한, 그런 영화였다.


 영화 <영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불안정'하다. 먼저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살아가는 주인공 '영주'와 동생 '영인' 남매다. 아직 스물도 안된 영주는 그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발버둥 친다. 하지만 동생 '영인'은 계속 밖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누나 '영주'에게 계속 짐을 지운다. 어떻게든 동생의 형사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영주는 극한의 상황까지 몰린다. 그런 영주의 눈에 보인 것은, 부모님의 교통사고 판결문과, 그 판결문에 적힌 피고인의 이름과 주소. 영주는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채 부모님을 죽인 가해자, '상문'을 찾아간다.

 


 '영주'는 대체 무엇에 이끌려 그곳을 찾아가게 된 걸까. 이 행동은 앞으로 이 영화에서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의 발단이 된다. '상문'은 아내 '향숙'과 함께 시장에서 작은 두부 가게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고, '영주'는 그런 상문 앞에서 얼떨결에 사람을 구하냐고 묻고, 그 두부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다. 상문과 향숙은 그 아이가 자신이 죽인 이들의 자식인 줄도 모른 채, 일도 잘하고 싹싹하며, 손도 야무진 '영주'에게 점차 이끌리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영주와 영인 남매, 그리고 상문의 가족은 이 사회를 하루하루 고통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두 가족이다. 하지만 두 가족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영화 <영주>는 그 '다름'을 '공'과 '두부'라는 소재를 이용해 효과적으로 은유했다.



 영인은 항상 집에 있을 때 벽에 공을 튕기는 장면이 자주 나오며, 상문의 가족은 두부 가게를 운영한다. 사고를 치고 다니며 영주의 속을 썩이는 영인의 모습은 이리저리 벽을 맞고 튕겨 나오는 공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항상 영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짐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영주의 삶의 모양도 어찌 보면 영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영인을 감옥에 가게 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영주. 영주는 돈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급전 대출을 받으려다 사기를 당하고, '향숙'의 두부 가게 돈통에 손까지 데려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행동이든 하려고 한다. 영화는 그런 영주, 영인 남매의 모습을 아직 젊고 어리지만, 그래서 어디로든 튀어 나갈 수 있는 불안정한 '공'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상문'의 가족들의 모습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상문' 가족의 모습은 마치 '두부'처럼 위태롭다. 무뚝뚝하긴 해도 자신이 일으킨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아직도 극도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사는 여리고 선량한 사람인 '상문'. 그리고 그런 남편과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두고도 열심히 두부 가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향숙'. 두 사람은 마치 갓 나온 뽀얗고 하얀 '두부'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두부 심부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검은 봉지에 담긴 두부 한 모를 들고 집에 갈 때는 다른 심부름을 할 때보다 불안하다. 들고 가는 통에 두부가 부서지고 깨지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조심조심 집으로 향할 때의 그 마음. 승일과 향숙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두부처럼 위태롭다.


 두부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영주'의 감정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자신을 딸처럼 아끼는 '향숙'의 따스한 말과 행동들. 매번 오빠의 딸이니 '내 딸 같아서'라고 말만 하는 고모와 고모부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따스한 감정. 아무런 이유 없이 네가 좋은 사람인 걸 안다며 돈통을 훔치려고 했던 '영주'에게 동생의 합의금을 선뜻 내어주는 '상문'과 '향숙'에게 '영주' 역시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주'는 그렇게 점점 '상문'과 그 가족이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에 입고 있던 엄마의 카디건을 벗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영주는 외출할 때마다 엄마의 카디건을 입고 외출했지만, 어느 순간 영주는 향숙이 시장에서 사준 얇은 분홍색 봄 점퍼를 입고 다닌다. 그렇게 '공'과 '두부'는 위험한 동침을 이어간다.  


 이렇게 영화 <영주>의 스토리를 마지막 엔딩 크레딧까지 힘차게 끌고 가는 소재는 '선악'이다. 이 영화에서 '선악'은 마치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씌우는 필터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한 장의 원본 사진이라고 한다면, 이리저리 씌우는 '선악'이라는 필터는 그때 그때 어떻게 씌워지느냐에 따라 인물들 관의 관계는 완전히 바뀐다.


 영주가 처음 상문의 가족을 찾게 된 계기부터가 영주의 눈에 씌워진 '선악'이라는 필터 때문이었다. 부모 없이 점점 무거워지고 고달파지는 삶 속에서, 영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악'의 근원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악의 근원은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상문'이었다.

 

 하지만 '상문'과 '향숙'이 베푸는 따뜻한 마음에 영주에게 씌워진 그 '선악'이라는 필터의 색이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 <영주>에서 이 필터가 점점 변하는 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몇몇 장면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모두 영주와 동생 영인이 충돌하는 장면들이었다. 동생 영인은 영주가 일하는 곳이 부모님을 죽인 사람인 '상문'의 두부 가게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영주를 추궁한다. 날 선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의 대화 중 영주는 영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보면 나쁜 건 우리 엄마 아빠가 아니냐고. 내 삶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 떠나버린 우리 엄마 아빠가 더 나쁘다고. 영주의 '선악' 필터의 대비(Contrast) 값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제 영주에게 '선(善)'이 '상문'과 '향숙'이 되고, '악(惡)'이 자신의 부모님과 동생 영인이 되는, 완벽한 대비의 순간.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지키려 했던 가족이 아니었는가. '부모'라는 이름을 가장하고 호시탐탐 우리 가족의 집을 노리려고 하는 고모와 고모부에 대항해서 어떻게든 그 보금자리를 지키려 했던 영주였다. 그것은 영주에게, 가족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지키려던 몸부림이었다.



 그 거대한 감정 변화의 원인을 좇던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일까?'라는 간단한 물음이었다. 간단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답을 고민하고 있는 그 물음 말이다. '성선설', '성악설', 때로는 '성무 선악설'까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나를 가장 고민하게 만들었던 주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영화 <영주>는 그에 대한 하나의 의견을 내놓았다.


 영화 <영주>는 '선악이란 결국 상황에 의해,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내 감정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 듯 뒤집힐 수 있는 것이 '선과 악'이다. '선악'은 인간이 지니는 그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내 정신 속에서 더 공고히 하고, 강화한다. 나의 필요를 정당화하고, 그 필요를 얻기 위해 내가 하는 행동을 강화한다. 마치 불꽃을 더 활활 태우는 장작처럼.  

 살면 살수록 더 냉혹하고 잔인해 보이는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 줄 부모님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영주의 마음. 그리고 목석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싹싹하고 애교 많은 예쁜 자식이 곁에 있었으면 했던 상문과 향숙의 마음. '공'과 '두부'가 그렇게 위험한 동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영주가 일하는 두부 가게의 주인이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상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영인은 그 두부가게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다. '상문'이 자신의 형사 합의금 300만 원을 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주와 영인이 말싸움을 하던 장면에서 부모님을 죽인 상문의 가족을 욕하는 말을 하는 영인에게 영주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 좋은 사람들이야."


 어느 순간 영인은 영주에게 끝까지 지키고 싶은 '가족'이 아닌, '상문'과 '향숙'의 막내딸로 살고 싶은 자신을 방해하는 '짐짝'이 되었다. 이제 영주에게 좋은 사람은 영인이 아닌, 향숙과 상문의 가족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난 이 글의 첫머리에 '영주'와 '영인'을 공에 비유했었다. 영화 초반만 해도 두 남매를 보며 난 '영인'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라면, '영주'는 더 탄성은 작지만,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튀어 오르며 그 운동을 이어가려는 존재처럼 생각했다. 영주와 영인 모두 영화에서 공을 가지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명확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인은 들고 있는 공을 벽 이리저리 던진다면, 영주는 식탁 위에서 자신이 손으로 확실히 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공을 작게 튕기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며 오히려 더 예상할 수 없게 이리저리 튕기는 공은 '영주'였다. 영인은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도 영주를 생각하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세상을 향한 답답함, 스스로 '악'이 되어가는 이의 죄책감에 의한 엇나감이었다. 향숙의 만류에도 담배와 술을 끊지 못하며 죄책감에 시름하는 '승문'처럼. 하지만 '영주'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더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은 어쩌면 '영주'였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관문은 여러분이 예상하는 그대로다. 과연 영주의 진짜 실체를 알고서도, '승문'과 '향숙'은 과연 영주를 처음처럼 계속해서 딸처럼 생각하고, 사랑해줄 수 있을까. 영인은 그 사실을 말하고서도 승문과 향숙이 아무렇지 않아 한다면, 자신도 모른 체 해주겠다고 말한다.


 결국 영주는 승문과 향숙에게 사실을 말한다. 사실을 말한 자리에서 승문과 향숙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늦은 밤 찾아온 영주에게 자고 가라며 방을 내어준다. 영주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한 영인에게 '네가 틀렸어'라고 문자를 보내려던 그때, 영주는 방에서 들려오는 승문과 향숙의 이야기 소리를 듣게 된다.


 "차라리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그렇다. 두부와 함께 하고 싶었던 공은 결국 두부를 으깨버리고 말았다. 영주는 몰래 승문의 집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마포 대교의 난간을 붙잡고 오열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하며 흐느낀다.


 "엄마... 엄마..."

  

 과연 영주가 그리도 그리워했던 엄마는 누구였을까. 자신을 낳아준 돌아가신 엄마였을까. 아니면 향숙이었을까. 이제는 엄마의 카디건도, 향숙이 사준 분홍색 봄 점퍼도 영주의 몸 위에는 걸쳐져 있지 않다. 다리 위에서 영주는 이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주의 오열은 어디에 가까웠을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사실을 말함으로써 결국은 잃게 되어 버린 엄마 '향숙'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었을까. 영화 <영주>는 그렇게 차가운 현실을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차가움으로 담아냄으로써, 보는 이에게 많은 물음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선악의 무용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차피 색안경을 바꿔 쓰듯 내 필요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선악'이므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악'은 결국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자신의 앞에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만을 볼 수 있을 테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 그 원인을 찾고 그것을 내 입맛에 따라 '선악'을 나누어 판단하는 건 사유할 줄 아는 자만이 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그 '선악'이 하는 기능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옛 전래 동화 대부분의 교훈이 '권선징악'인 것처럼.


 다만, 우리는 그 '선악'의 필터에 갇혀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영주>는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컬러'다. 필터를 벗겨내면 우리는 진짜 세상의 모습을 본다. 영주도 필터를 한 꺼풀 벗겨 내자 부모를 죽인 원수를 부모로 삼고 싶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선악'의 필터에 갇힌 시선에서 보면 분명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영주를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배신한 배신자로, 그런 영주를 욕하는 영인을 '효자'로 본다면 그것은 또 옳은가? 이리저리 사고를 치고 다니며 영주를 힘들게 한 영인의 모습을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저 피고인, 가해자의 입장으로만 봤다면 '승문'은 악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정녕 '승문'을 '악'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선악'은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눔으로써 본질을 흐린다.

 

 '선악'이라는 필터를 결국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인간이라면, 한번쯤 그 필터가 나를 필요 이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벗어 놓고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한 가지에 매몰되는 것은 좋지 않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컬러'로 되어 있음을, 내 상식을 벗어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현실을 100% 있는 그대로 다룬 이런 영화들이 더 무겁고 아픈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흑백'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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