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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Dec 06. 2018

그중 제일은 믿음이라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밀은 마가린 같다. 잘 퍼지고 심장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첫머리에서 맘(?)들을 위한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던 스테파니(안나 켄드릭)가 꺼낸 한 마디에 바로 귀가 쫑긋했다. '스타일리시 스릴러'를 표방하던 이 영화의 광고 문구답게 '비밀'에 관한 날카롭지만 위트가 넘치는 한 마디로 영화의 문을 여는구나 싶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그렇게 내게 기대감을 한껏 안기고 막을 열었다.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스타일리시'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스릴러'로서의 매력이 그렇게 컸는지에는 약간의 물음표를 그리게 한다.

 폴 페이그 감독은 지난 작품인 <스파이>와 <고스트 버스터즈> 때부터 지속적으로 '젠더'에 입각한 틀에 박힌 캐릭터의 역할에서 탈피한 '젠더 스왑' 영화를 내놓고 있다. 이번 영화인 <부탁 하나만 들어줘>도 예외는 아니다. 한적한 교외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두 명의 여성 캐릭터,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다. 에밀리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숀(헨리 골딩)은 꽤 비중 있는 역할이지만 두 여성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서브 주연'에 가깝고, 이 마을에 사는 또 다른 학부형인 대런(앤드류 라넬스)은 마치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았던 역할처럼 백치미를 탑재한 감초 조연 캐릭터다. 똘끼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매력적인 에밀리를 연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베일에 둘러싸인 미지의 에밀리를 파헤치는 엉뚱 발랄한 싱글맘 스테파니를 연기한 안나 켄드릭은 캐릭터에 착 달라붙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연기를 펼쳤다.

 폴 페이그 감독 특유의 전형적인 '틀을 깨는' 영화답게 그의 작품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분명 아주 '스타일리시' 하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 전체적인 색감의 사용이 매우 감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특히 영화의 두 주인공 스테파니와 에밀리의 의상에서 이 영화의 예민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극 중 에밀리는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답게 무채색 계열의 정장을 자주 착용한다. 반대로 싱글맘 전업 주부인 스테파니는 노란 트렌치코트나 원색 계열의 옷을 많이 착용한다. 에밀리는 아주 보이쉬하지만, 스테파니는 매우 걸리쉬하다. 그런 그들의 성격적인 차이를 색상과, 그에 따른 의상 선택으로 시각적으로 매우 잘 드러냈다. 그리고 영화 내내 샹송이 아주 많이 사용되었는데, CF나 방송을 통해 자주 들었던 'Commet te dire adieu' 같은 노래들은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가 풍기는 특유의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스릴러'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반전의 섬뜩함이나 놀라움은 조금 약했다. 영화의 반전 플롯은 사실 기대한 만큼 놀랍지 못했다. 물론 그 플롯 자체로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그 메시지를 풀어내는 플롯이 조금 예상 가능하고, 뻔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서두에 인용한 영화의 대사처럼,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의 스토리도 에밀리와 스테파니, 그리고 숀이 품고 있는 각자만의 비밀들과, 그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나는 과정과 같다. 똘끼 있지만 당차고 멋지게 사는 에밀리와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게 된 스테파니는 그녀의 삶을 조금씩 동경하게 된다. 그러다 갑작스레 에밀리가 실종된 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갑작스레 아내를 여읜 숀과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던 스테파니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하게 되고, 스테파니는 자신이 동경하던 에밀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에밀리가 갑자기 자신의 흔적을 마을에 드러내기 시작하며 점차 사건은 고조되어간다. 스테파니는 불안함에 에밀리의 과거 흔적을 좇기 시작한다. 그렇게 에밀리와 스테파니, 그리고 숀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진실 게임'이 영화 막판까지 펼쳐진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 사람 중 모든 진실이 밝혀진 사람은 '에밀리'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조금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모든 반전과 비밀이 밝혀졌지만 꺼림칙함은 남아있었다. 그 꺼림칙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영화가 말하는 '비밀'과 '진실', 그리고 '거짓'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 때문이었다.

 에밀리는 '비밀'이 밝혀짐과 동시에 악역이 되어버렸고, 스테파니와 숀의 빛나는 활약에 힘입어 감옥에 가게 되며 이 영화는 마치 '권선징악'의 이야기처럼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분명 에밀리뿐만 아니라 스테파니와 숀도 각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싱글맘인 스테파니는 이복 오빠와의 부적절한 관계, 그리고 그것을 의심한 남편이 그녀의 이복 오빠와 함께 탄 자동차가 석연찮은 사고가 나 죽음을 맞게 된 이야기가 있었고, 영문학 교수인 숀은 조교와 은밀하게 맺고 있는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삶의 이야기가 '거짓'임이 까발려진 에밀리만 벌을 받으며 영화는 끝났다. 뭐랄까, '권선징악' 같지 않은 '권선징악'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렇게 만든 그 '어긋남'은 무엇일까. 영화를 곱씹어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믿음(Faith)'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에밀리'의 이야기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물론 반전을 보는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반전의 재미를 느끼고 싶으신 분이라면 스크롤을 내리지 마시길)


 

 '에밀리'의 비밀은 그녀가 세 쌍둥이었다는 것이다. 세 쌍둥이의 이름은 'Faith'와 'Hope' 그리고 'Love', 한국말로 하면 믿음, 소망, 사랑이었다. 'Love'는 임신 중 엄마의 뱃속에서 죽었고, 'Hope'와 'Faith'는 자신들을 학대하는 아버지에 맞서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후 헤어진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았고, 영화에 등장한 에밀리는 'Faith'였다. 마약에 잔뜩 절어 밑바닥의 삶을 살던 'Hope'가 갑작스레 돈을 요구하며 'Faith'를 찾아왔고, Faith는 Hope를 죽이고 사망보험금을 얻기 위해 잠적했던 것이다. '에밀리'의 시신은 사실 Faith가 아닌 Hope였다. 이 하나의 '비밀' 때문에 스테파니와 숀, 에밀리는 속고, 또 속인다. 과연 숀은 에밀리의 비밀과, 보험금을 향한 그녀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숀의 조교와의 염문은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스테파니와 숀을 이간질하기 위해 에밀리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영화는 스토리가 점점 고조되며 계속 여러 가지 의문들을 남기고 있었다.


 세 쌍둥이의 이름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faith, hope,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믿음과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 이곳저곳에서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문장이다. 하지만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이 문장은 유효하지 않다. '사랑'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았다. '소망'은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다 '믿음'에 의해 죽었다. 살아남은 건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Faith)'은 아까도 말했던 비밀과 진실, 거짓 사이의 '어긋남'이었다.


 결국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영화였다. 어찌 보면 소망과 사랑이 생겨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믿음이다. 믿음에 따라 소망과 사랑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믿음이 동반되지 않는 소망과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삶이 이어질 것이란 믿음이 없이 소망이 존재할 수 없으며, 상대를 향한 믿음이 없이 사랑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진실과 거짓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던, 거짓을 말하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것을 ‘믿기로’ 하느냐의 여부이다. 스테파니가 에밀리를 믿지 않게 된 순간, 말 그대로 ‘믿음’을 포기한 순간, 그들은 한순간에 절친에서 적대 관계로 돌아선다.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에밀리가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스테파니가 가만히 에밀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면, 이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스테파니가 믿음을 포기한 것은 에밀리의 삶을 동경한 그녀가 애초에 에밀리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원제인 'Simple Favor', 즉 그 '간단한 부탁'은 어쩌면 '믿음'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조금만 뒤틀어 보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에밀리(Faith)'는 분명 악역이 될 만한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었지만,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당당하고 솔직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캐릭터는 분명 에밀리였다. 반면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숨겨진 진실을 밝힌 영웅이 되지만, 사실 상냥한 천생 여자인 그녀는 가장 비밀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그 대비는 명확히 드러나는데, 친해진 두 사람이 진실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에밀리는 자신이 숀과 조교와 함께 쓰리섬을 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스테파니는 처음엔 말할 게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이복 오빠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진 사실을 말한다. 물론 두 이야기 모두 진실인지 거짓인지, 영화에선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소재는 '미안해'라는 말이다. 습관적으로 '미안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스테파니에게 에밀리는 그 말을 앞으로 하지 말라고 말한다. 솔직한 성격의 에밀리에게 습관적인 '미안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위선과 거짓처럼 느껴졌던 것일 테다.


 그러니 난 이 영화의 결말을 '권선징악'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저 믿음을 잃은 이들에 의해 거짓이 탄로 난 에밀리는,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패배한 것이다. 반대로 스테파니와 숀은 에밀리의 비밀을 밝혀 내고 자신들의 비밀을 지킴으로써 승리했을 뿐이다. 'Faith(믿음)'은 그렇게 차에 치였고,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스테파니는 더 잘 나가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었고, 숀은 대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게 과연 권선징악일까. 믿음을 잃은 누군가에 의해 스테파니가 숨겨온 진실이 탄로 나고, 숀의 진실이 탄로 났다면 이 이야기의 구도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것이 감독이 이 이야기를 통해 의도한 것이 아닐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스릴러로서의 반전 매력은 조금 반감되었지만, 영화가 내뿜는 스타일리시한 매력과 심오한 메시지는 충분히 이 영화를 볼만하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위에서 나는 스테파니가 입는 원색의 의상과, 에밀리가 입는 무채색의 옷의 차이에 대해 말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딱 한번 스테파니가 에밀리의 검은색 드레스를 입는 장면이 나온다. 호기심의 그녀의 옷을 입은 스테파니는 갑작스레 에밀리의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방문에 놀라 옷을 벗으려 하지만 꽉 끼어버린 옷은 벗겨지지 않는다. 결국 그 옷을 입고 형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스테파니는 형사가 나가자마자 벗겨지지 않는 드레스를 가위로 잘라버린다.

 이 장면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데, 에밀리가 사라졌지만 스테파니는 에밀리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검은색의 드레스는 스테파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베일에 싸인 비밀들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이의 드레스를 입고 있기에 의심을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마치 자신의 숨겨진 비밀이 드레스를 통해 잠시 동안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결국 형사가 스테파니의 그 의심쩍은 모습을 '믿기를' 바래야만 할 테니까.  

 

 '믿음'(faith)은 차에 치였지만 감옥에 갇혔을 뿐 사랑과 소망이 죽은 와중에도, 죽지 않았다. 우리도 모두 가슴속에 비밀 하나는 꼭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 믿음과 소망, 사랑 중 제일은 무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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