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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Dec 24. 2018

편견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영화 <그린 북(Green book)>

 


 최근 본의 아니게 인종 차별을 그린 책이나, 영상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넷플릭스의 드라마인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Dear white people)>과 할리우드의 몇 안 되는 아프리카계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드라마 <She's gotta have it>, 그리고 책으로는 앤지 토머스의 베스트셀러 <당신이 남긴 증오 (The hate you give)>까지. 약간만 더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통쾌한 흑인 여성들의 성공 스토리를 그렸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와 마지막으로 <블랙 팬서>와 <크리드>를 연출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수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까지. 막상 곱씹어보니 정말 많다.  

 철저한 무논리에서 만들어진 백인들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흑인들의 모습을 보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측은함'이었다. 그래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백인 경찰이 쏜 총에 맞는 오스카의 모습을 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을 느꼈을 것이고,  <히든 피겨스>에서 캐서린이 백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며 나사 안의 수많은 백인 남자들이 아무도 해내지 못한 프렌드쉽 7호의 지구 귀환 궤도를 계산해내는 모습에서는 더 큰 카타르시스와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암울했기 때문에 그 기저효과가 훨씬 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리뷰를 통해 소개할 영화, <그린 북>은 어딘가 조금 달랐다. 천재 피아니스트와 그의 공연 투어를 함께하는 운전기사의 이야기. 이 말만 듣고 본다면 누구든 천재 피아니스트가 '백인'이고, 운전기사는 '흑인'이라고 생각하리라. 마치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처럼. 예를 들고 보니 이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 비슷하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는 데이지 부인일 것이고, <그린 북에서는 천재 피아니스트일 것이다.)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운전기사'와 만나 우정을 나누고, 결국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  



 하지만 <그린 북>이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 완벽한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포인트는, 영화 <그린 북>에서는 천재 피아니스트가 '흑인'이고, 운전기사가 '백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백악관의 초청까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우아함과 교양이 넘치는 천재 피아니스트 '도널드 셜리'(마허 샬라 알리)는 연말에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기획한다. 문제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의 미국 남부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내에서도 극심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일할 사람을 구하게 되고, 면접을 통해 뉴욕의 어느 클럽에서 가드로 일하는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을 고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린 북>은 그 두 사람이 뉴욕에서 출발해 남부 투어를 함께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영화다.



 영화 <그린 북>은 두 주인공, '도널드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캐릭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흑인, 백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탈리아계 특유의 뺀질뺀질함과 가족적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토니 발레롱가'는 주먹과 입담, 두 가지만으로 험난한 미국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물이다. 철자를 몰라 편지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교육 수준이 낮고, 돈도 많지 않지만 그에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은 토니의 삶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와준 흑인 배관공들에게 대접한 물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흑인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도널드 셜리'는 토니와 정 반대의 인물이다. 우리와, 그 당시를 살던 그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셜리는 높은 학식과 교양을 쌓은 우아한 '흑인' 피아니스트다. 토니의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우아한 옷을 입고 마치 왕좌 같은 자리에 앉아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도널드의 모습은 말끝을 흐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말투를 쓰는 토니와 크게 대비된다. 클럽 가드로 일하며 강한 주먹과, 주먹보다도 강한 세치 혀로 문제를 해결해내는 일명 '떠버리', 토니의 능력과 명성을 알고 있던 셜리는 토니를 자신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다.



 당시의 심각한 인종 차별을 잘 드러내는 첫 소재가 토니가 고용된 후 받게 되는 '그린 북'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린 북'은 아무 시설이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는 유색인종을 위한 호텔과 식당, 편의시설이 담겨 있는 여행 안내서다. 책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셜리가 남부에서 겪게 될 고초를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토니와 셜리는 함께 미국 남부를 다니며 수많은 비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다. 셜리는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좋은 숙소에 묵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는 토니가 훨씬 더 좋은 숙소에 묵고, 셜리는 동네 여관방 같은 곳에 묵기도 한다. 어떤 공연장에서는 검둥이 주제에 뭘 그렇게 따지느냐며 명확하게 계약서에 명시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준비해놓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지역은 그저 백인들의 술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셜리는 건방진 무개념 흑인이 되어 백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도 한다.



 그 수많은 부조리들을 해결하는 건 특유의 문제 해결 능력으로 하나하나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떠버리' 토니다. 사실 보는 입장에서 처음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토니도 결국은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지닌 사람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고용주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정을 함께하며 서로 얘기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도 겪는다.


  그 과정에서 셜리와 토니는 서로의 외양에 숨겨져 있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처음 뉴욕을 떠날 때의 셜리와 토니가 서로에게 철저히 '돈'으로 묶인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시작했다면, 여느 로드무비들이 그렇듯 여행길의 끝에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본 셜리와 토니는 진정한 친구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사실 천재 피아니스트가 흑인이고, 운전기사가 백인인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한 나 자체도 매우 편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그린 북>은 단순한 인종 차별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편견과 차별, 갈등 그 '자체'가 쓰고 있는 수많은 가면들과, 그 본질에 대한 영화였다.

 

 토니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훌륭한 가장이지만, 사회에서 그가 하는 일은 '건달'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그는 셜리를 마치 고고하고 우아한 척은 혼자 다하는 재수 없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혼자 방을 쓰며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며 밤을 보내는 셜리의 모습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테다. 영화 초반 셜리의 몫으로 부인이 만들어 준 샌드위치까지 자신이 다 먹어버리는 모습은 셜리에 대한 토니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투어가 계속되며 이유 없이 백인들에게 맞고, 경찰의 이유 없는 불심검문이 계속되는데도 셜리는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이유 없는 억압에 대항하고 싸우려는 토니를 계속해서 막는다. 사실 셜리는 한 번도 백인들의 부당한 요구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다. 백인 전용 화장실을 쓰지 말라고 하면 차를 타고 몇십 분을 더 가서 자신의 숙소 화장실을 이용했고, 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하면 그대로 응했다. 조곤조곤 말로써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토니는 그런 셜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토니는 셜리를 흑인이면서도 흑인 답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셜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피아노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인 셜리는 3살에 피아노를 시작해 아주 어린 나이에 러시아의 음악 학교에 들어가 클래식을 배웠다. 그렇게 백인 문화 한복판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교양과 학식을 쌓았지만 국내로 돌아와서는 클래식이 아닌 대중적인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흑인을 백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음반 회사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셜리는 백인 청중들 사이에서 그의 화려한 피아노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 철저히 훈련되고 길들여진, '원숭이'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는 결국 '흑인'일뿐이기 때문에. 그는 흑인으로서의 삶도 배우지 못했고, 그렇다고 백인이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동성애자였다. 영화 초반 가족이 없느냐고 묻는 토니의 물음에 셜리는 계속해서 투어를 다니다 보니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과도 멀어지고 가족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지만, 아마 셜리 스스로는 가족이 없는 이유는 아마 자신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난 대체 뭐죠?"


  빗속에서 토니와 다투다가 셜리가 하는 이 대사는, 사회 속의 어떤 집단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둘 수 없는 셜리의 고민과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셜리를 힘들게 한 것은,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에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의 크기만큼이나 셜리가 스스로 세워놓은 편견의 벽도 매우 높았다. 토니의 작은 행동에도 그를 쉽게 판단한 듯한 셜리의 표정은 셜리 스스로도 수많은 편견으로 채워진 인물임을 나타냈다. 편견은 그렇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며, 어지간해서는 쉽게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셜리에게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함께 트리오로 활동하며 남부 투어를 함께한 바이올리니스트 올렉은 셜리가 이런 꼴을 당하면서도 매년 뉴욕에서 하는 공연보다 돈도 안 되는 남부 투어를 계획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냐고 토니에게 묻는다. 그리고 올렉은 말한다. 때로는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기댈 수 있는 어떤 프레임도 없었던 셜리에게 아마 그 용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자동차 한 대로 투어를 함께하며 셜리의 마음에 쌓인 편견의 벽을 허문 것은, 다름 아닌 백인 '토니'였다. 어찌 보면 토니는 조금 특이한 캐릭터다. 당시 모든 백인들이 가지고 있던 흑인에 대한 편견을 그도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집에서 흑인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결국 셜리와 토니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토니의 그런 편견이 이유가 없는, 얼떨결에 사회가 자신에게 씌운 프레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토니는 리틀 리처드나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당대의 유명한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켄터키에 오면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봐야 한다며 '한 번도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는(!)' 셜리에게 치킨을 가르쳐 준 것도 토니였다.


 처음에 셜리는 운전을 잘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기에 토니를 고용했지만 그는 토니를 교양 없고, 남을 등쳐먹는 걸 좋아하는 '사기꾼'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철자도 잘 모르면서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믿음직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토니에게 점점 마음을 연다. 그리고 셜리는 토니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주며 둘은 점점 갈등과 반목을 넘어 가까워져 간다. 셜리는 교양은 없어도 붙임성이 좋은 토니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토니도 점차 수많은 이유 없는 편견 속에서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된 셜리를 존경하게 되고, 점차 마음을 열고 편지를 쓰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셜리에게 마음을 열었다. 셜리는 토니를 흑인을 억압하는 백인에 대한 편견으로, 토니는 셜리를 돈 많고 고고한 부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마음의 교류로 품고 있던 편견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내게 이 영화가 좋았던 지점은, '편견'이 이루어지는 방향이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이라는 점이었다. 무조건  둘 중 하나를 가해자, 하나를 피해자로 나누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의미가 있었다.

 '편견'은 차별을 하는 이에게도 찾아오지만, 차별을 받는 이에게도 똑같이 찾아온다. 교양 있게 부탁하는 척하며 문화와 전통, 관습이라는 말을 앞세워 당당하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백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셜리는 같은 숙소에서 묵던 다른 흑인들에게조차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어울리기를 거절하는 셜리에게 아주 고귀하셔서 우리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하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셜리는 단지 누구에게도 흑인 문화를 배운 적이 없어서, 그들에게 외려 피해를 주게 될까 완곡히 거절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 없는 자신을 향한 비난은 셜리 스스로의 편견의 벽을 높이 쌓는 데 큰 역할을 했을 테다. 편견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프레임을 가지고 이리저리에서 사람의 마음에 꽃혀 들고 있었다.  

 영화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셜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흑인과 백인 모두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잘 드러냈다. 그리고 셜리는 그런 상황을 '품위'라는 말로 그저 피하려고만 했다. 그는 남부 투어를 통해 무엇인가 바꿔보려는 큰 용기를 냈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부분, 공연을 하기로 한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사를 하지 못하게 막는 지배인에게 공연을 거부하는 셜리의 모습은 토니를 통해 변화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셜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버리' 토니와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토니는 영화의 마지막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셜리를 '검둥이'라 칭하는 친척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말하며, 이제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토니와 셜리는 서로에게 인생에 있어 큰 변화를 안겨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민족인 대한민국에서 30년을 산 나로서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흑인들의 그 억압과 차별의 설움을 가슴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편견이 존재한다. 돈을 가지고, 학벌을 가지고, 사람을 나누고 쉽게 그 사람을 판단한다. 어쩌면 모두가 같게 생겼기에, 본능적으로 무엇으로든 급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어떻게든 편을 가르고, 자신이 그 위에 서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욕망인 것인가.


 확실한 것은, 편견으로 얼룩진 시선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편견 때문에 흘려보낸 인연들 사이에는, 후에 언젠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유색인종 라이브 클럽에서 그가 너무 많은 현금을 꺼내놓자 그에게 강도짓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들끼리는 '형제'라고 말하는 '흑인들'이었고, 그들에게서 다시 한 번 셜리를 구한 것은 '백인' 토니였다.

 물론 과거의 경험을 통해 사람을 '분류화' 해놓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에서 얻는 경험이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과 맞는 사람을 판별하고, 좋은 사람을 자신의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심한 '분류화'를 우리는 편견이라고 말한다. 한 개인이, 그리고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만든 프레임에 너무 기대다 보면 그것은 편견이 되고, 나아가 차별이 되며 심하면 억압이 되기도 한다. 인종, 소득, 계급 등 사회를 여러 집단으로 나누는 이런 '프레임'들은 가르기도 쉽지만, 가리기도 쉽다. 그 프레임에 기댄 허약한 개인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 집단이 주는 거대한 힘을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 프레임 때문에 피해를 받은 이들도, 셜리처럼 마음에 거대한 벽을 두르며 자신만의 편견을 공고히 해 나간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남혐 여혐과 같은 갈등도 결국은 크게 보면 그런 '프레임'에 의한 갈등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인터넷의 많은 게시물들은 '공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자신이 경험한 수준 이하의 남자와, 여자를 예로 들며 한남, 김치녀와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해 공감을 이끌고자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듯, 갈등과 반목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서로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다면,  대화를 하고 싶겠는가 싸움을 하고 싶겠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셜리가 보여준 용기처럼, 부당한 억압과 차별에는 분명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그 용기가 자칫 잘못 나아가면 프레임에 의한 이유 없는 차별의 시선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 이유 없이 그 목소리를 내 목에 들이댄 칼날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지, 싸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그린 북>에서 토니와 셜리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이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인지 한 번이라도 이해하고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이해를 낳고, 화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영화는 크리스마스에 셜리가 토니의 가족을 찾아, 오손도손 모여앉아 식사를 하며 끝이 났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영화의

결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이유 없는 차별과 편견 없이 서로에게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다 맞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프레임이 만들어낸 편견어린 시선이 어떤 타인의 진실된 모습을 가린다면, 그런 세상은 분명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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