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더독>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언더독>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팀들이었다. 스포츠에서 리그 우승이나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이 낮은, 말 그대로 '못 하는' 팀들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팀들은 대체로 이런 '언더독'들이다. 정치권에서 경쟁에서 뒤지는 사람에게 동정표가 몰리는 현상도 '언더독'이라 한다.
새삼 제목을 참 붙였다고 생각했다. 지구 상에서 짐승,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아닌 동물이 점하는 위치는 매우 낮다. 인간 다음인데 따지고 보면 2위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두 집단 중 2위면 꼴등이니 낮다고 해야 할 테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콧대가 안드로메다까지 솟아있는 1위의 횡포는 너무나 극악무도하다.
그중에서도 인간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는 동물들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개들과, 고양이들이 그럴 것이다. 묘하다면 참으로 묘한 것이, 인간과 가장 친하고 가까운 이 동물들은 인간의 일생과 매우 비슷하다. 돈 많은 보호자를 만난 반려동물들은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호의호식하며 화려한 견생, 혹은 묘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길에 버려져 쓰레기를 주워 먹거나, 차가운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웅크리며 잠을 청하는 동물들도 부지기수다.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그들의 견생이고, 묘생이다. 인생에 대해 금수저, 흙수저 운운하며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말하는 사람과 묘하게 닮아 있다.
영화 <언더독>은 인간에게 버려지고, 세상에게 버려진 '개'들의 이야기다. 국산 애니메이션 중 그래도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준 <마당을 나온 암탉> 오성윤 감독과, 이춘백 감독이 함께 만들었다.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 어린이를 뛰어넘어 어른까지 사로잡아버린 마성의 픽사 애니메이션 작품들 덕에, 요즈음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에 기대하는 수준은 전보다 매우 높아져 있다. 그것은 훌륭한 CG 기술도 물론 한몫을 해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과하지 않을 정도의 감동으로 보는 이의 심금을 적절하게 울리는 그 특유의 '감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언더독>의 만듦새는 그리 깔끔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캐릭터들이 너무 평면적이었다. 사실 동화라는 점에서 캐릭터가 너무 입체적이라면 어린이들이 보기에 좀 복잡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인물들의 선악에 대한 스탠스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영화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조금은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았다. 초반 사냥꾼 개장수에게서 뭉치의 목숨을 구해준 슈나우저 '봉지'나, 버림받은 노견은 극 중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소모되어 버린 점도 아쉬웠다. 물론 '동화'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앞에서 말한 마성의 픽사 애니메이션들이 관객의 눈을 너무 높여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인물이 선하다면 왜 선한지, 악하다면 왜 악한지 그 당위성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단순한 '권선징악'의 플롯으로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언더독>은 내게 만약 아이가 있다면, 열일을 제치고서라도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는 동물을 기른다는 것,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무게에 대해 아이들이 무언가 분명히 느낄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사듯 강아지를 집에 데려왔을 때, 지금은 벅찬 즐거움에 상상조차 하지 않을 미래 그 언젠가에, 지금은 너무나도 예뻐하는 그 강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 영화는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자연스럽게 얼마 전에 관람한 <베일리 어게인>이라는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영화에서 베일리 역시 견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베일리 어게인>은 어디까지나 미국적인 감성이 짙게 배인 영화였다. 베일리는 집 앞 넓은 마당을, 넓은 벌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한국의 개들은 어떤가. 좁디좁은 아파트의 미끄러운 바닥에 적응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짖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예민 보스'들 곁에서 숨죽인 채 살고 있으며, 잠깐의 산책 동안에도 목에 묶인 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다.
영화 <언더독>은 <베일리 어게인>처럼 개로서 사는 삶에 대해 대한 영화지만, 한 단어를 덧붙여야 한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 개로 사는 삶'에 대한 영화다. 이 땅에서 버려진 개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먼저 인간에게 버려졌지만, 인간과 함께 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개들이 있다. 뭉치가 처음 버려져서 만나게 되는 짱아와 그 일행들이 대표적인데, 도시 근처에서 살아가며 인간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살아가는 개들이다. 또는 밤이 와 토리 가족들처럼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산속에서 살며, 야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들개'들도 있다. 영화는 뭉치와 짱아 일행, 그리고 밤이 와 토리 가족이 그들 중 누군가 나이가 많은 개 한 마리(이름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일전에 본 적이 있다는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다. 내용 상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살짝의 스포를 하자면, 그 유토피아는 DMZ였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일 테니,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처음에 난 주인공 '뭉치'가 인간의 곁에서 사는 삶과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삶 중 하나를 택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그 답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들개'가 되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결론에 스스로 도달했다. 하지만 들개가 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평온해질 수 있을까. 영화 '치킨 런'에서 닭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달하고자 했던 그런 '유토피아'가 대한민국에도 존재할까. 이런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협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개에게 '주체성'을 부여했다. 관객들에게 스스로 개들이 자신의 견생에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의의라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뭉치 일행은 길을 떠나던 중 우연히 만난 개를 아끼는 마음씨 좋은 인간들 곁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는데, 떠나야 할 때가 되자 짱아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이 곳에 남아 있겠다고 뭉치와 일행에게 말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에서 이 '주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때 짱아가 하는 이 말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이번엔 인간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인간을 선택한 거야.
이 글의 첫머리에 나는 지구 상에서 짐승에 점하는 위치는 매우 낮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나도 결국 인간이다. 내가 뭐라고 한 생명의 위치와 서열을 마음대로 논한다는 말인가. 이 장면을 보며 개들은 아마도 우리에게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해 주기를, 온정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다. 개를 키우고 싶은 인간은 돈을 주고, 개를 데리고 있던 인간은 그 돈에 상응하는 대가로써 개를 넘겨준다. 하지만 개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저 갑작스레 나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 바뀌게 되었고, 지금부터 나와 함께 하게 될 이 사람은 누구일까 정도를 궁금해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했지만, 인간에게 말도 안 되는 거대한 망상 하나를 머릿속에 심어 놓았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개장수 사냥꾼이 개를 쫓는 이유도 돈이고, 펫 샵에서 아직도 엄마 곁에 있고 싶을 그 작은 생명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온갖 인간들이 귀엽다며 예쁘다며 두들겨대는 창문 앞 상자에 가둬놓는 이유도 돈이다. 개들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인간들은 뭐 때문에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냐고. 그것은 다름 아닌 돈 때문이다. 반려동물은 하나의 재산이라고, 그저 '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그리고 꼭 알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돈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결말을 살짝 귀띔하자면, 개들은 돈이 모든 논리의 정점에 있는 그 더러운 세상을 등지고, 결국 DMZ에 도착한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는 뭉치 일행이 그 자유로운 곳에서 오손도손 살아가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보여주며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는 말을 에둘러했다고 생각해주시길.)
'대한민국에서 개로서 사는 삶'을 잘 묘사해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영화 <언더독>은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꾸 <베일리 어게인>을 언급하게 되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는 베일리와 인간 사이의 우정이었다. '귀엽다'는 말은 정말 많은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귀엽다'는 말은 나보다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사랑스럽게 대할 때 많이 통용되는 말 같다. 물론 '귀여워해' 주는 것은 좋지만 말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위치를 켜고 꺼서 짖음을 조절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앞으로 반려동물의 보호자가 될 미래의 아이들이 마음 깊이 인지할 수 있으면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영화일 것이라 믿는다.
사실 이 영화는 강아지들이 겪는 모험을 통해 인간 스스로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로 성공한 인생의 시작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라고, 인생을 하나의 '도박'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물론 그 생각을 절대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수많은 경쟁 속에 치이고 치여 너덜너덜 해져버린 나로서도 분명히 좋은 부모 만나야만 호의호식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생각을 안 해본 바 아니다. 하지만 영화 <언더독>을 보고 나니 묘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들도 저렇게 자기 견생을 찾아,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그 무언가를 찾아다니지 않는가. 극 중 저들이 지니게 된 주체성이란 하나의 허구이지만, 너에겐 그 주체성이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비단 개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우리 모두는 영화에 나오는 뭉치 일행처럼 '언더독'이다. 하지만 동정표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언더독'이 되지는 말자. 자기가 인간을 사랑해주는 만큼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주인을 만난 짱아처럼,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살아 숨 쉬는 유토피아를 만난 뭉치와 그 일행처럼, 힘들고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는 그 배짱과 자존심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부딪혀보자. 그런 '주체적인' 언더독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