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주원 May 10. 2019

'이상'과 '현실' , 그 사이의 균형

영화 <논픽션>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로 무를 자르듯 쉽게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단어가 있다. 바로 '픽션'과 '논픽션'. 너무도 각각이 그 의미를 명확히 지니고 있지 않은가. '허구'라면 픽션'이고 '허구가 아니라면' 논픽션, 간단명료하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까. 


'거짓'이면 픽션, '사실'이면 논픽션.


 일견 타당한 명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논픽션>을 보고 나면 이러한 구분이 너무 거칠고 단순하다 못해, 잔인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영화 <논픽션>은 저 두 단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은, 참으로 '프랑스 영화'다운 영화였다는 것이다. 영화 <논픽션>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99.9%가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다. 그것도 간단한 '대화'가 아닌, 세상의 변화 그 현상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가득 들어있는 '토론'이다. 난해하고 심오하며, 철학적인 대부분의 '프랑스 영화'가 그렇듯, 이러한 분위기가 생소한 사람이라면 분명 지루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눈에 띄는 '기승전결'도 없이 그냥 자기들끼리 장면만 바꿔가며 이어가는 신랄한 '토론'을 쉼 없이 따라가다가, 지쳐갈 때쯤 엔딩 크레딧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평소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철학적이고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몇 달은 생각해 보고 누군가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훌륭한 화두를 안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시 아까의 명제로 돌아가서, 영화 <논픽션>은 '픽션'과 '논픽션'의 미묘한 관계, 너무 철학적이어서 무거울 수밖에 없는 주제를 '대화'와 '유머'를 통해 나름대로 가볍게 풀어냈다. 영화 속 이들의 '토론'을 표면적으로 보면, 줄거리로 정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크게 보면 출판사 사장 '알랭'(기욤 까네)와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디지털 마케팅 담당자 '로르'(크리스타 테렛)가 나누는 '종이책과 e북'에 관한 논쟁이 있고, '모든 픽션은 자전적'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와 몇몇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학으로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관한 갈등이 있다. 이외에도 몇몇의 '외도'와 정치인, 사업가, 배우의 이야기 등 너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열띤 대화가 오간다. 물론 이 난잡해 보이는 모든 '대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위에서도 말했듯, '픽션과 논픽션의 미묘한 관계'다. 이 리뷰는 이것에 대한 내 감상을 중심으로 정리해나가고자 한다. 


 영화 <논픽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들은 단 하나의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과정이다. 


'생각'은 '픽션'이다.


 그렇다. '생각'이라 함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세상에서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임에 있어, 그것이 사람을 통해 이해되는 과정에서 크게든 작게던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일련의 '허구적 상상'의 과정이 당연히 필요하다.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으로 비유할 수 있을 텐데, 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감상이 다른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은 말 그대로 '픽션'이므로,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하나의 '픽션'이며, 이를 확장해보면 우리들 각자 개개인은 하나의 '픽션'을 지닌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나는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가 약 77억 정도 되니, 이 세상은 77억 개의 픽션이 이리 얽히고 저리 설켜 있는 곳이다. 그 세상을 우리는 '논픽션'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머릿속의 '생각'은 말과 몸짓을 통해 현실이 된다.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실제로 아침을 먹음으로써 '사실'이 된다.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현상'은 결국 개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픽션'이 말이나 몸짓을 통해 '사실'로서 실현된 결과다. 픽션은 실현됨으로써, 픽션이 아닌 것이 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개인의 '픽션'이 어떠한 방법으로 세상에 '사실'로서 실현된 것이 '논픽션'이다. 그러므로 '논픽션'이란, 셀 수 없이 많은 '픽션'이 서로 충돌하는 화학적 집합체다. 


 

 그 결과, '픽션'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짓이라 말할 수 없고, '논픽션'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라 말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성립하게 된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픽션' 즉, 소설은 어디까지나 '논픽션'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개연성이 1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픽션'의 자양분은 '논픽션'이다. 그리고 문학 작품으로서의 '논픽션'은 결국 누군가의 '픽션'이 현실화된 것에 기반하므로, 결국 '논픽션'의 자양분은 '픽션'이 되는 묘한 순환 관계가 성립한다. 이 둘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지 않고 철저히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 보완하며 작용하고 있다. 두 단어 사이에는 이처럼 가깝고도 먼 철학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결국 영화 <논픽션>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논픽션'의 세상에서 벌어진 하나의 '현상'을 주제로 개인이 각자의 '픽션'을 펼쳐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태블릿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해진 하나의 '현상', 즉 '논픽션'이 있다면 이를 가지고 '로르'는 장기적으로 종이책을 e북과 같은 온라인 콘텐츠로 대체해 나가야 한다며 자신의 '픽션'을 '알랭'에게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오히려 종이책의 매출이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완벽한 분석에 의한 결과 같은 '로르'의 의견도 결국은 가설이지 않은가. '논픽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적중의 '확률'을 높여줄 뿐, 어디까지나 적중의 '확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77억 개의 픽션이 융합하고 충돌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픽션이 완벽히 실현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끝이 없어 보이는 그 경우의 수 위에서 단 하나의 '픽션'을 손에 움켜쥔 채 살아간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 같은 사람은 그 알 수 없는 '논픽션'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 위에서 자신이 지닌 하나의 '픽션'을 온 세상에 펼쳐 보였기에 우리는 그들을 '파이오니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그러니 이 영화의 관점에서,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픽션의 완벽한 논픽션화'라고 할 만하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는 이상'의 실현일 테니까.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이 원하던 '이상'을 성취했느냐다. 


 우리가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듯, 자신의 '픽션'을 세상에 '논픽션'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칙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우회하여 충족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짓'이라 말한다. 위에서 말한 '논픽션'이라 하여 무조건 '진실'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논픽션', 즉 '사실'은 진실로서도 존재하지만, 거짓으로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토론'과 함께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다른 소재가 또 있다면 그것은 '외도'다. 알랭은 셀레나(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레오나르와 발레리(노라 함자위)는 부부 관계지만 알랭은 로르와, 레오나르는 알랭의 부인인 셀레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외도를 행하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특별한 죄의식이나 복수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셀레나의 외도는 전혀 알랭의 외도에 대한 복수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촌스러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외도'는 일종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거짓'이라는 것 자체가,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가닿았다. 외도를 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맹목적으로 그 사랑에 도취해버렸다기보다는, 무엇인가 결핍된 것을 채우는 과정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 속 인물들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그 관계를 '현실'의 사랑, 즉 아내와 가족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여느 천편일률적인 영화들처럼 '외도'라는 부적절한 사랑에 도취되었다면, 그들 모두 파멸하며 영화는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각자만의 방법으로 '이상'과 '현실', 그 사이의 오묘한 공간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외도'의 현장은 마치 '거짓'이라는 장막으로 가려진 그들만의 작은 '픽션'의 세계 같달까. '거짓'과 '비밀'이라는 장막 속에서 '논픽션'으로 실현된 '픽션'은 더 달콤하고, 짜릿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작은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밀'의 사랑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현실의 '사랑'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결코 외도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단순히 욕구의 충족이기 이전에, 하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사랑은 고결하고,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같은 픽션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유는 아마도 개인들의 '픽션'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일 텐데, 이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사랑'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는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게 '사랑'은 하나의 '약속'으로서 합의되었다. 하지만 장막을 치고서라도 어떻게든 픽션을 논픽션 화하고 싶은 욕구를 숨길 수 없는 인간은 '불륜'이라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어쩌면 '거짓'을 창조해낸 것은 '약속'과 '믿음'이 아니었을까.  


 이들의 관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알랭'과 '로르'의 관계와, '레오나르'와 '셀레나'의 관계는 조금 다른 질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알랭'과 '로르'의 관계와 그들이 나눈 대화들은, 다분히 '사업적'이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소설가인 '레오나르'와 배우인 '셀레나'의 관계는 '예술적'이고, '이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알랭과 로르는 사회 현상이라는 '현실' 즉, '논픽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자신들의 '픽션'으로 앞으로의 미래가 어떨지 예상하지만, 레오나르와 셀레나는 '예술'과 '작품'이라는 '픽션'에 중심을 잡고, '현실'과의 균형을 잡기 위해 고민한다. 레오나르의 부인인 '발레리'는 유력 정치인의 홍보 담당자다. 정치인 역시 '유권자'라는 이름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픽션'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다. 발레리는 그런 정치인의 '이미지'를 관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안이라는 '현실'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발레리도 역시 '알랭'이나 '로르'처럼 '현실'에 무게중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논픽션>은 알랭과 셀레나를, 레오나르와 발레리를 부부로 연결함으로써 그들의 관계에 알 수 없는 엇갈림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동그라미에 세모를 억지로 끼워둔 것처럼. 그럼으로써 그들의 외도는 마치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끼리, 세모는 세모끼리 맞춘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위에서 알랭과 로르가 나누는 대화의 화두는 종이책과 e북을 통한 미래의 예측에 있었다면, 레오나르와 셀레나에게 화두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다. 레오나르는 모든 픽션은 자전적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연애사, 혹은 부적절한 연애사를 소설에 옮긴다. 독자와 여론은 이를 '팩션'이라고 말하며 연애의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듯한 레오나르의 소설을 비판하기도 한다. 셀레나는 한 드라마에 시즌 6까지 출연하며 자신을 모두 소진해버렸고, 더 이상 연기에 몰입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르와 셀레나의 불륜 관계는 레오나르는 자신의 소설의 소재라는 자양분을, 셀레나는 앞으로 연기 생활을 이어감에 있어 필요한 자양분을 얻어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는 '비밀'의 장막에 감춰져 있어야 할 그 과정을 계속해서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예술'을 행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레오나르는 '픽션'이 아닌 '논픽션'에 중심을 두고 있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연애사'라는 '사실'이 없으면 그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아름다운 '논픽션'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그 '논픽션'은 '픽션'처럼 아름답다. 또한 불륜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지만, '사실'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실이다. '논픽션'이 되지 말았어야 할 '논픽션'인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픽션'으로 가장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소설 자체가 재미있을진 몰라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행동이다. 

 어쩌면 레오나르는 소설가로서 그리 자격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얻기 위해 칠흑 같은 의식 저 너머의 심연에 손을 담가야만 한다. 예술가가 되려면 누구보다 드넓고, 단단한 자신만의 '픽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레오나르의 소설엔 그런 고민의 흔적은 크게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알랭이 그의 소설을 출간하기를 계속 거부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영화는 예술에 있어서도 '픽션'과 '논픽션'이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레오나르의 말처럼, 소설은 자전적이다. 하지만 그의 자전적인 소설은 균형이 맞지 않았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 안에서 존재하면서 그 개연성을 찾아야만 하지만, 그 안에 자신만의 생각과 사상이 담겨있지 않다면 그것은 '속 빈 강정'이다. 영화 속에서도 레오나르의 소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 작품의 문학적 작품성보다는,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진짜냐는 '팩션'의 관점에만 맞춰져 있었다. 문학적 작품성을 그 사람만이 가진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레오나르의 작품엔 그것이 부족한 것일 테다. 결국 사람의 인생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그 균형을 찾는 과정임을 영화 <논픽션>은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영화 <논픽션>에 대한 감상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제목은  'Double vies', 번역하면 '이중생활'이다. 여기서 프랑스어 'vie'는 우리가 c'est la vie에서 많이 본, '인생'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이중생활'을 한다. 모든 사람에겐 두 가지의 자아가 존재한다. '이상 속의 자아'와 '현실 속의 자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 나온 단어를 빌리자면 '픽션 속의 자아'와 '논픽션 속의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인생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줄을 타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상에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몽상가'라고 부르고, 현실에 너무 치우친 사람은 '속물'이라고 부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자신의 영화 <논픽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디지털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논-픽션>은 그러한 변화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물살에 몸을 맡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영화 <논픽션>은 그런 감독의 생각을 잘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 그 어느 쪽에 중심을 두고 있던 그것은 각자가 그 물살에 나름대로 몸을 맡기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랭과 셀레나, 레오나르와 발레리 모두에게 그것은 c'est La vie, 그것이 그들의 인생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그들의 인생을 철저히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관객에게 전달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자신의 '픽션'을 철저히 배제한 채, 최대한 사람들의 인생을 '논픽션' 그 자체로서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결국 그마저도 감독이 원하는 '픽션'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이 영화 안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화'의 모습은 어떠한가. 종이신문 독자가 줄고 대부분의 뉴스가 인터넷으로 소비되면서 누구나 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를 악용한 가짜 뉴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모두가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통해 글을 소비하고 블로그를 이용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종이책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뉴스나 짧은 글만 그런 방식으로 소비할 뿐, 종이책의 소비는 오히려 늘어났다.

 그리고 SNS를 이용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매개로 연결되었다. 그것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응집하고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재스민 혁명'이나 '우산 혁명'같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SNS는 인간의 헛된 허상을 충족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은 각자가 마음에 품은 '픽션'을 '논픽션'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의 결정체다. 그것이 실제가 아님에도 실제인 것처럼 자신의 삶을 헛된 방법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한다. 

 아사야스 감독의 말처럼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77억 개의 픽션들이 끊임없이 화학 작용을 벌이면서 말이다. 여기서는 우리 세대가 당면한 모습인 '디지털화'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이것이 또 다른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면 '산업화'되어가는, 혹은 '근대화' 되어가는 변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습과 양상만 변화할 뿐 인간과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 즉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관점에서,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것들은 유사 이래 계속되어 왔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논픽션'의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를 이끌어 가는 건 77억 개인의 '픽션'이다. 주제만 변할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픽션'과 '논픽션'은 '사실'과 '허구'의 차이가 아닌, '현실'과 '이상'이었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사실'과 '허구'는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과 '이상'은 서로가 긴밀히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에,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물살 속에서 사람들은 그 균형을 고민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픽션'과 '논픽션'의 미묘한 관계였다고 나는 받아들였다. 



 너무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이다 보니, 영화 내용의 정리라기보다 그저 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읊어나가는 데 급급했던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영화 <논픽션>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영화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심, 프랑스 인들의 삶이 부러워졌다. 카페에서, 술집에서 사회 현상에 대한 철학적이고 심오한 대화가 일상적으로 오가는 그들의 일상이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개진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너무 성향을 드러내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와 토론이 거센 '세상'이라는 물살 속에서 개인이 균형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대화를 통해 너무 '이상'에 치우쳐가는 사람은 '현실'을 잃어버리지 않게, 너무 '현실'에만 시선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잊고 살았던 자신만의 '이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 대화가 우리에게 주는 순기능일 테니까. 영화 <논픽션>은 마치 몇 시간 동안 철학자들과 심오한 대화를 나눈 것처럼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영화였지만, 오히려 생각이 복잡해진 그 자체가 보는 이에게 새로운 지적 '유희'를 가져다주는 좋은 영화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누는 맛'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