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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May 23. 2019

선(善)의 평범성

영화 <김군>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수십 명의 공수복장의 공수대원들이 그 집 앞마당을 에워싸고 오고 있더라고요.(중략)
 가지고 있던 총을 집 천정을 뜯어서 올려놓고 그다음에 안주머니에 있던 실탄 30발을 비닐부대 안에 숨겨 놓고 손 들고 나오라는 소리와 더불어 밖으로 손 들고 나가니까...(중략)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바로 집단구타를 시작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엎드려져서 말입니다. 계속 짓밟는 대로 밟히고 있으니까 일으켜 세우더라고요. 그러면서 바로 제 10년 넘게 친구를 갖다 말입니다. 관자놀이에 대고 반 하사가 M-16으로 그냥 쏴버리더라고요. 그래가지고 그냥 죽었읍니다.
그 친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_제145회_28차 발췌)


 1989년 2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28차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그에게 던져진 질문에 증인 최진수 씨는 10년 전인 1980년 당시,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이 본 그 참혹한 광경을 20대의 투박한 말투로 어떻게든 그 애석한 죽음을 말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열심히 증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8년. 이제 중년이 된 최진수 선생은 영화 <김군>의 제작진에게 89년 국회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었다. 영화 <김군>은 그 두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같은 이야기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거대한 시간의 격차 사이의 묘한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최진수 선생의 말투는 89년의 그때보다 조금은 더 정돈되어 있었고, 담담했다. 하지만 1989년과 2018년의 그에게서 딱 한 가지의 공통점만은 발견할 수 있었다. 1980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에도, 38년이 지난 2018년에도, 그 일을 설명할 때 그는 그것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아랫입술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영화 <김군>을 보며 불현듯 평생 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장면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 유명한 '악(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했다. 나치의 비호 아래 수많은 유태인 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은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평범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절대악'이라는 것은 없으며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끔찍한 악행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 <김군>을 보며, '선(善)의 평범성(Banality of Good)'을 생각했다. 이런 말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최진수 선생을 보며, 다른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 분들을 보며 세상에 '절대악'이 없다면, '절대선'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분연히 맞선 이유는 '독재 타도'나, '민주화'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군홧발에 짓이겨지고 총검에 찔리고, 총탄에 맞은 죄 없는 내 이웃, 내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악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평범한 행동들이 모여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라는 '절대악'이 그려진 것처럼, 광주를 지키려는 시민 한 명 한 명이 모여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거대한 파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김군>도 거창한 이유에서 시작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는 아주 작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했다.

  매서운 눈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어느 시민군. 이름도 없이 '김군'이라 불리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는 물음에서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기에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냐는 물음이 생긴다. 그것은 이 사람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내려온 600명의 북한특수군 중에 한 사람, 이른바 '제1 광수'라는 역사학자 지만원 씨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광수'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북한특수군'의 준말이다. DNA 증거나, 목격자도 없이 사진 몇 장을 근거로 내세운 지만원 씨의 이런 주장에 무려 561명의 당시 사진 속 광주 시민이 '북한특수군'으로 둔갑했다. 그들 중에는 현재 북한 실세로 알려진 최룡해, 이을설 그리고 천안함 폭침 사건의 배후로 잘 알려져 있는 김격식도 포함되어 있다고 지만원 씨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맞서고자 오월 단체들은 지만원 씨가 지목한 '광수'들을 하나 둘 찾기 시작한다. 영화 <김군>은 1980년, 그 뜨거웠던 5월에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베일에 가려진 '김군'의 정체를 밝혀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마치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 듯 느껴지는 긴장감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극적 재미를 제공한다.


 하지만, 영화 <김군>에서 중요한 것은 '김군'의 정체가 아닐 것이다. 그의 정체를 밝혀 가는 과정에서 만난 광주 민주화 운동 피해자들을 통해 영화는 1980년 이후 광주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조명한다. 1980년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이었던 시민군 참여자들은 약 40년이 지난 지금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있었다. 영화는 그분들의 이름을 자막으로 소개하며 당시의 나이를 이름 오른쪽에 작게 적어놓았다. '당시 18세', '당시 21세'. 이름 옆에 적혀 있는 그분들의 당시 나이는 마치 그분들의 시간이 아직도 1980년 그때의 멈춰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총탄의 일부가 몸에 박혀 있는 피해자 분도 계셨고, 엎드려서 물만 대도 무서워서 아직까지도 이발소에 가면 직접 머리를 감는다는 분도 계셨다. 그분들의 무의식 깊숙이 뿌리 박혀 있을 그 '공포'는 나 같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일 테다. 악(惡)이 평범한 것이듯 선(善) 또한 평범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강력한 공격에도 끄떡없는 슈퍼맨이나 헐크, 토르와 같은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 사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불의에 맞서 싸운 그들에게 남은 건 '고통'과 끝나지 않는 '공포' 뿐이었다. 영화 <김군>은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담담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으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그 큰 상처를 조금이나마 더 정확하게 프레임 안으로 옮기고자 노력한다.


 영화가 끝나고 강상우 감독과 양희 작가를 모시고 이루어진 GV에서 관객 중 한 분이 강상우 감독에게 '계엄군'의 시선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은 없으신지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 질문에 강상우 감독은 영화 <김군>을 찍으며 피해자 분들이 애써 잊고 살아온 상처를 끄집어내야만 했던 힘듦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다고 답했다. 감독님의 답변은 그랬지만, 그 질문을 들으며 속으로 나는 꼭 짚어봐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도 이렇게 평범하듯, 악도 평범할진대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조명할 수 있어야 영화 <김군>이 더 높은 완성도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을 주제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 뿐만 아니라,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옴진리교의 신자 8명의 인터뷰를 담은 '약속의 장소에서'도 출간한 것처럼.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당시 계엄군이었던 사람들 중에는 소수의 양심선언을 한 분들도 있지만, 아직도 자신들은 대한민국을 적화 통일하려던 괴뢰들의 음모에 맞서 광주를 지켜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군인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에 대해 생각하도록 훈련받지 않았다. 그로 인해 계엄군이었던 이들도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마음속에 큰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그것을 선으로 믿고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38년 전 그들이 떠났던 그 '화려한 휴가'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논리를 아직까지도 믿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 다시 말하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반증한다. 인간이 무언가 '행동'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이유'가 필요하다. 예전에 영화 '영주'의 리뷰를 쓰면서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결국 '선악'이라 함은 누군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행동을 하도록 강화해주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계엄군의 총칼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있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계엄군으로 참여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있을 수 있다. 아마 두 어머니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안타까운 것은, 사람은 너무 평범하고 나약하기에 어느 한쪽을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당시의 시민군 중 자신들이 '폭도'였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없듯, 계엄군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이 죄 없는 시민들을 학살한 미치광이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그 사람들의 선택은 각자 자신의 입장을 '절대선'으로, 그 반대가 되는 이들을 '절대 악'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선도, 악도 미칠 듯 평범한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선과 악이 필요한 이유 역시 사람은 평범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볍게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선악'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선악'이 진실을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것일 테다. 신군부의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시위 진압은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총을 손에 쥐도록 만든 이유이며, 계엄군이 죄 없는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글을 읽고 난 사람이라면 '절대악'이 왜 없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시민군도 계엄군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결국 군의 명령 체계 맨 위에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엄군에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한 이가 있을 것이고, 그가 '절대악'이 아니겠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태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히틀러도, '서울의 봄' 향한 열망을 아주 가볍게 묵살해버린 신군부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마도 이른바 '전체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의 구성원이 마치 기계의 톱니 부품처럼 질서 정연히 움직이는 '사회 질서 확립'이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그 '사회 질서 확립'이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이 죄 없이 흘린 피를 마치 고장 난 기계를 고친 것이라는 듯 '부득이한 희생' 혹은 '정당한 희생'으로 여기는 시선은 절대 옳지 못하다고 난 믿는다.


 결국 영화 <김군>에서 '김군'의 그 모습은 어쩌면 그 '평범함'을 은유하고 있었다. 평범한 성씨에 부모님의 젊은 시절 앨범을 넘기다 보면 사진 어딘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얼굴. 그런 사람이 헬멧을 쓰고 장갑차 위에 앉아 총을 들고 있는 사진. 내가 느낀 영화 <김군>은 내 이웃을, 내 친구를, 내 마을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1980년 5월의 광주 곳곳에 무기를 든 채 자리하고 있었을 수많은 평범한 '김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욕본다며 닭죽을 쑤어주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먹인 평범한 '김군', 혹은 '김양'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이 지나고 39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 어딘가에서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그들에 대해서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자행한 잔인한 폭력까지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김군'은 계엄군 중에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외국인이 탄 서울 택시는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고, 차 트렁크에 숨겨진 서울 번호판을 확인하고도 그 택시를 광주 밖으로 빼내 준 어느 계엄군처럼. 결국 그 '김군'들을 이끈 건 본인 스스로가 '애국자', '선'이라는, 스스로 옳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고, 평범한 '김군'들은 고통 속에 그 시간들을 견디며 살아왔다.


 세상에 '절대악'은 없을지 몰라도, 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그 '선악'이라는 프레임을 교묘하게 이용해 평범한 '김군'들을 피해자로, 혹은 가해자로 내몰았던 신군부는 '사회 질서 확립'이라는 정당성을 근거로 1987년 시민들이 다시 한번 불합리한 독재 권력에 대항할 때까지 대한민국을 몇 년 더 지배했다. 그분들이 나름대로는 어떤 거대한 '민족적 사명'과 '역사적 책무'를 안고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까지도 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미사여구로 꾸며댄 그 많은 말들 속에는 권력을 얻고 싶은, 지키고 싶은 '탐욕'이 분명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조차 나약해서 '역사적 책무'라는 말로 자신들이 행했던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모쪼록 그분들도, 과연 어떤 것이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끌어가는 것일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

 위에서부터 계속 말하듯, 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어느 한쪽을 '선'이라고 보고 있는 프레임에 기대 서서 다른 한쪽을 '절대악'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는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야만 한다. 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역사를 보면 한 명의 훌륭한 리더가 한 나라, 한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한 지도자는 없었다. 세계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은 훌륭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안겨줬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지도자는 없다. 어찌 보면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명제는 진리와도 같지 않은가. '선거 제도'는 '최선'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닌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말처럼. '민주주의'는 1인 혹은 소수의 폭정, 횡포를 방지하고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정치 제도다.

 

 분명 그 과정은 시끄러울 것이다. 우리 모두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며, 포털 사이트 뉴스의 댓글창은 생각이 다른 서로를 악으로 몰고, 욕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어쩌면 민주주의란 구성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물론 논리 없는 원색적인 비난은 지양해야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고, 토론하면서 하나의 의견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옳음, 그것이 '선'이라고 믿는 한 가지 생각을 갖고 그것을 열심히 소리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총칼이 아닌, 말로써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란 '선악'이 필요한 사회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사회여야만 한다. 그것이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비효율을 효율로 만들기 위해 흘린 그 무고한 피들을 생각한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난 믿는다.


 악의 평범성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군인'이라는 특수성을 백번 이해한다 하더라도, 계엄군은 당시의 절대 권력이 제공하는 논리에 기대어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인간적 동정심도 없이 시민들을 구타하고 폭행했다. 하지만 선의 평범성은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했다. 광주 시민들이 옳지 못한 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분들은 불합리한 권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그런 거대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런 소수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그저 내 주장, 일부의 주장이라고 믿으며, 그때의 광주 사람들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불순 분자'라고, 어쩌면 아직도 북한이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을 '선악'이라는 잣대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한 건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그것을 '생각'이 다른 거라고 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프레임 안에서 상처 받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선악'은 싸우는 이들에게 나름대로의 정당한 용기를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끝난 후 그들이 받을 상처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그것을 시끄러워하고 귀찮아한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무서워지는 시대를 다시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2의, 제3의 광주 민주화 운동 같은 일이 우리에게 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범한 우리는 또 다른 '선악'의 프레임에 기대어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 한번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대야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평범하다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다는 것은 절대 우리가 톱니바퀴의 부품처럼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인간성'일 것이다. 영화 <김군>을 보고 나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김군'이 미국 어딘가에 이민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는 어느 피해자 분의 말처럼 다시는 평범한 '김군'들에게 그와 같은 공포와 고통을 안기지 않기를, 누군가가 만들어낸 '선악'이 아닌 그저 각자가 생각하는 '평범함' 속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살아가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p.s 영화 <김군>은 전국 80여 개의 스크린에서 오늘인 5월 23일에 개봉한다. GV에서 들은 말에 의하면 스크린 수가 너무 적은 것도 문제지만, 관객이 많지 않을 경우 2주 정도면 영화가 완전히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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