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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21. 2019

'세상'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블랙 미러>를 본 나의 짧은 생각

  <블랙 미러>라는 말에 처음 떠올린 감정은, '답답함'이었다. '거울'인데 '새까만 거울'이라. 아무것도 볼 수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끝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머리를 감쌌다. 그렇게 빠져들게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는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보는 이에게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남겼다. 



 왠지 모르게 몸을 옥죄어 오는 듯한 그런 답답함에도, <블랙 미러>는 계속해서 다음 화를 재생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드라마다. <블랙 미러>는 지금의 우리를 마치 민낯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하나로 묶인,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술 진보의 파도에 올라탄, 바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다. 혹자들은 <블랙 미러>를 '근미래'의 세상을 담은 '우화'라고 이야기하지만 난 이것을 '근미래'라고도, '우화'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블랙 미러>는 아직까지 우리가 목도하지 못한 '상상의 기술'을 CG로 구현해 냈기 때문에 '근미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난 그 기술들을 보며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더 발전한 기술일 뿐, 우리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기술보다 조금은 투박하고, 구식(?)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드라마 속 인물들이 누리고 있는 것 대부분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기에 '미래'가 아닌 '근미래'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근미래'라는 표현을 '곧 다가올 현재'라 표현하고 싶다. '미래'라고 하는 단어에 '근(近)'이라는 말이 수백, 수천 개가 붙는다고 '현재'가 되지는 않는다. <블랙 미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지금의 우리도 충분히 겪고 있는 문제들이다. 국경을 초월해 이 세계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인간관계의 신기원'을 만들어줄 것 같았던 SNS가 오히려 '개인'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으며, 그저 편리할 줄만 알았던 과학 기술들이 결국은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듯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블랙 미러> 속 세상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그런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블랙 미러>는 '우화'라기보다, 차라리 '동화'에 가깝다. 거칠게 말하자면, '우화'라 함은 인격화된 동식물이나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블랙 미러'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람이다. 단순히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블랙 미러>는 무언가에 빗대서 간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잔인할 정도의 '사실성'을 담아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놀라운 기술들이 등장하는 이 세상에서, 그 기술을 대하는 우리 모두는 '어린이'나 마찬가지다. 눈부시게 발전한 정보,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편리와 풍요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이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을 뿐 우리는 이 기술들의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블랙 미러>는 마치 먼 미래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 우리에게 전해 준 '예언'처럼 느껴진다. 원래 '동화'는 과거의 '어른'이 미래의 '아이'를 위해 남기는 이야기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교훈을 전해주는 이야기. 지금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다. 앨빈 토플러가 주장한 '제3의 물결'만큼 앞의 두 물결은 그렇게 거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미래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변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새로운 '동화'가 필요하다.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지금 이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어린이'이며,  <블랙 미러>는 이 모든 변화의 결과를 목도한 미래의 '어른'이 과거의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잔혹동화'다. 



 <블랙 미러>를 보며 느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배경'만 변했을 뿐,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블랙 미러>가 그 칠흑같이 검은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즌 1의 에피소드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살아온 기억을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멋진 세상에서 결국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아내의 불륜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고, 시즌 3의 에피소드 '추락'에서 주인공이 더 나은 사회적 계급을 얻기 위해 갈구하는 '평점'은, '평판'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그 기술이 없어도 지금의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에피소드에서 군인에게 살육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사람을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마스크'라는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는 과학자의 논리는, 마치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첨단 기술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들보다 그 스케일이 커지고 화려해졌을 뿐,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블랙 미러>가 그리는 미래의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인 이유는, 바뀐 '배경' 속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 이기심 때문일 테다. 


 '창(窓)'과 '거울'의 차이는 무엇인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제목이 <블랙 윈도우>가 아닌, <블랙 미러>인 이유를 생각하자, 난 <블랙 미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창'는 그것 너머의 세상을 비추지만, '거울'은 그것에 반사된 반대편,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비춘다. 사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 하면, '거울'보다는 '창'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블랙 미러>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면서 우리 자신을 비춘다. 마치 너희 인간이 아무리 더 나은 미래를, 저 너머의 세상을 꿈꾼다고 해도 너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그 세상은 칠흑같이 새까맣다. 



 '세상'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그 세상은, 그냥 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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