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성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은 '감사'해야 할 일이지, '과시'할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도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날아오르지 못했을 뿐 다들 살아있다는 것은 적어도 가라앉지 않고 헤엄은 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우리 모두가 똑같이 30%의 노력을 기울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누가 누구의 노력을 평가한단 말인가. 그것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가 '노력'이라는 가치를 대하는 태도였고,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지점이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많게든 적게던 분명히 '이정표'라 느껴지는 순간에 봉착하는 때가 온다. 그 혹은 그녀는 분명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나름의 피나는 노력을 거쳐 그곳에 이르렀을 것이다. 논술 시험이나 수능 시험, 혹은 중요한 면접을 보러 가는 날과 같은 날 아침이면 대문을 나서는 내게 엄마는 거의 매번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먹어. 어차피 '운칠기삼(運七技三)'이야.
아니, 운칠기삼이라니. 처음엔 갸우뚱했다. 어차피 합격은 운이니 지금까지 내가 한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도 잠시, 정말 어차피 당락 여부는 오직 신만이 아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내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가 지금의 몇 분, 몇 시간으로 결정될 것 같은 그런 순간에,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 마법의 말은 '운칠기삼'이었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운'이 무려 7할이나 차지하는 세상에, 지지리도 운이 없어 실패를 겪고, 세상에서 소외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등장인물인 '베르트랑'(마티유 아말릭)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 영화는 시작부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동그라미는 절대 네모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베르트랑'은 중요한 면접마다 계속해서 고배를 마시며 2년째 백수로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다. 아내가 벌어오는 생활비로 살아가며, 두 아이는 매일 소파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빠를 무시한다. 그런 그의 내레이션은 마치 자신이 이렇게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 이유에 대한 변론처럼 들린다. 어렸을 때부터 동그란 눈으로 동그란 세상을 보며 자라왔는데, 크고 나니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네모' 안으로 들어오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동그라미는 '절대' 네모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이제 네모로 들어가는 것을 더 이상 시도할 힘조차 사라져 버린 무기력한 그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런 베르트랑이 우연히 동네 수영장 게시판에서 '남자 수중 발레단' 팀원 모집 공고를 보고, 그곳에 입단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베르트랑'을 비롯한 남자 수중 발레단 팀원들의 면면은 어떠한가. 우리가 수영 선수하면 떠올리는 근육질의 몸매에 시합 때마다 동네 주민들의 환호를 받는 '수구' 팀과 달리, 수중 발레단은 하나같이 배 나온 아저씨들 뿐이다. 그것뿐인가. 파산 직전의 사장님부터 어수룩해서 매일 당하기만 하는 모태솔로(?) 수영장 관리인, 집도 없이 캠핑카에서 사는 이름뿐인 로커, 아직 불어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민자 등등 그들은 모두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이들이다. 게다가 수중 발레단 코치 델핀은 다이빙대 위에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며, 과연 이들을 훈련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런 그들에게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남자 수중발레 세계 선수권 대회에 프랑스 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사실 그 이유조차 어찌 보면 어이없기도 한데, 프랑스에서 아무도 출전하는 이가 없기 때문. 그들은 그렇게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배 나온 아저씨들이 대회에 나가기 위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객석에서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거의 매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특히 코치 델핀이 영화 중간에 불의의 사건을 겪으며 코치직에서 물러나고 새 코치 '아만다'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웃음이 빵빵 터지기 시작한다. 델핀과 달리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빡쎈 스파르타식 훈련'을 지향하는 아만다에게 지쳐 나가떨어지고 '참가만으로도 족하다'라고 말했다가 아만다의 야무진 등짝 스매싱을 찰싹찰싹 맛깔나게 맞으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어수룩한 아저씨들의 귀여움에 웃음이 떠날 새가 없었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프랑스 영화는 의미는 있을지 언정 지루하다.'는 편견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영화였다.
또 하나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가 '노력'이라는 가치를 대하는 방법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수중발레팀 팀원들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며 살아간다. 로커 시몽의 딸은 자기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며 자꾸 학교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시몽을 창피해하고, 백수 베르트랑은 두 아이에게는 물론 처형과 그 남편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베르트랑이 처형 남편의 가구점에서 일하게 되며 그 무시는 더욱 심해진다.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한심함'이다. 밑바닥을 기어 다니면서도,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것에 대한 창피함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수중발레 대회 도전'에 대한 시선도 그렇다. 남자가 수중발레를 하다니, 게이나 하는 것 아니냐며 조롱하기 일쑤다.
그런 점에서 대회에 참가하는 그들을 훈련하는 수중발레팀의 코치 '델핀'과 '아만다'가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델핀'은 훈련을 하는 팀원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할 수 있다고 의욕을 북돋우며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코치였다. 하지만 '아만다'는 항상 팀원들을 다그치고 몰아붙였다. 그 정도 하찮은 노력으로 무슨 메달을 딸 수 있겠느냐며 때리고 욕하는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델핀'은 천사고, '아만다'는 악마로 보인다.
그러나 '델핀'은 수중발레팀에게 '안식처'같은 포근함을 제공했을지언정, 제대로 된 훈련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콜 중독 클리닉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수중발레팀을 통해 그녀도 마음의 안정과 안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일 때 위로를 받고 마음은 편안했지만, 그게 다였다. '델핀'이 혼자서 끝까지 수중발레팀을 맡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절대 메달을 따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만다가 아저씨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분명 수중발레팀이 원하는 목표인 '메달'에 도달하기 위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훈련과 노력은 필수적이었을 테다. 영화의 후반부에 결국 델핀과 아만다가 함께 코치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 수중발레팀은 가장 좋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대회 출전이라는 '목표'가 생기기 전 수중발레 팀은 말 그대로 '루저'들의 모임일 뿐이었다. 훈련이라고 해봐야 물속에서 이리저리 발버둥 치다가 나오면 서로의 우울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고 끝나는 그런 모임. 어쩌면 이 영화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북돋우며 살아가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에게 '목표'를 제공했다. 목표의 달성은 그저 '공감'과 '위로'와 같은 감성팔이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이 영화의 원제인 'SINK or SWIM'처럼,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야 한다. 그들은 '아만다'를 통해 목표를 향한 '노력'을 그들에게 다시 일깨움으로써, 목표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목에 메달을 걸어준 것은 악마처럼 보였던 '아만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말하면 아마 단순한 '성공 스토리'처럼 보일 것이다. '피나는 노력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 결국 이것 아닌가.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 영화가 '노력'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좋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수중 발레단의 코치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만다'였다면 어땠을까. 이리저리 사람을 몰아붙이는 통에, 아마도 대회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채 팀이 공중분해되지 않았을까. 애초에 아무도 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델핀'이 팀원들과 함께 쌓아 놓은 끈끈한 정에서 비롯된 '팀워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우승'과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서로의 우울한 삶을 '위로'하고 '공감'을 통해 다져온 그들만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중발레를 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헤엄쳤다. 이 영화는 '노력'을 단순히 '성공'을 향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 '위로'와 '공감'이라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노력'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수중발레팀 팀원들은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무기력하고 작아 보일지 언정, 무언가 해내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은 누구보다 순수했다. 베르트랑이 영화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동그랗게 태어난 그들에게 네모로 변하길 원했다. 네 귀퉁이에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맞부딪혀 찌르고, 싸우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라고 말했고, 세상은 그것을 '노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매끄럽고 부드럽기만 한 동그라미처럼, 선한 눈을 하고 세상이 그들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
하지만 '네모'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수중발레를 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은 한심해 보일 수 있다. 마치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천진난만하게 수중발레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각지고 날 선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동그라미'들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삶의 성공과 실패를 말할 때, 대부분은 '노력'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나도 '노력'의 숭고함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무리 삶 속의 모든 일들이 70%의 운과 30%의 노력으로 결정된다 하더라도, 30%면 굉장히 큰 숫자다. 7할의 운만으로 승승장구해나간다 한들 3할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성공은 큰 의미도 없을뿐더러,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노력'을 평가의 잣대로 활용하려 하면서 시작된다. '노력'은 절대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삶의 모습을 '부'나 '재력'과 같은 한 가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부'를 많이 차지한 삶을 노력하고 성공한 자의 삶, '부'를 차지하지 못한 삶을 노력도 할 줄 모르는 실패자, 낙오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베르트랑을 멍청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던 처형과 그 남편의 모습에 분노를 느낀 관객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뭔데 알량한 직업이나 재력을 가지고, 남의 인생을 저울질한단 말인가.
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말이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노력'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삶들 중 한 단면으로 볼 일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정해준 한 가지 잣대에 세뇌되어버린 우리는,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세상이 붙여준 실패자, 낙오자라는 우울한 이름표를 붙이고 풀이 죽은 채로 살아간다. 하지만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그것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는 노력이다. 당신이 성공에 성공을 거듭해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당신이 남들보다 2~30%의 노력을 더 기울였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공의 비결을 '피나는 노력'이라 말한다 한들,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30%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어떤 잣대로도 남의 노력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아까도 말했듯 30%의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3할을 가지고 있으니까.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향한 노력은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혹자들은 '노력을 하면 운이 저절로 따라온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매우 건방진 말이다. 절대 '노력'은 '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죽어라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당신이 지금 무언가 이뤄내고,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할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남자 수중발레팀 팀원들은 모두가 삶 속에서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실패'의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그들 역시 하루하루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자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노력하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델핀'과 '아만다' 코치는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의 삶 속 '노력'을, 그들이 숨쉬고 살아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해 줬다. 날아오르려면 적어도 물속에서 헤엄은 치고 있어야지, 가라앉으면 죽고 만다. 그리고 두 코치들도 팀원들을 통해 삶에 새로운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그 7할의 운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성공'도 그렇듯 '실패' 역시 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다.
'성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은 '감사'해야 할 일이지, '과시'할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도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날아오르지 못했을 뿐 다들 살아있다는 것은 적어도 가라앉지 않고 헤엄은 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우리 모두가 똑같이 30%의 노력을 기울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누가 누구의 노력을 평가한단 말인가. 그것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가 '노력'이라는 가치를 대하는 태도였고,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지점이었다.
7할의 운은 일부에게만 주어진 특권같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 운은 아마도 탄생과 죽음 사이의 인생 전체를 걸쳐 분포해있을 것이다. 인생 초반에 운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년에 집중되어 있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고루 뿌려져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운이 지금은 당신 곁에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영원히 머무르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억지로 각을 세우고, 날을 세우며 네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손을 맞잡고 동그라미로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요지경같은 인생 속에서 적어도 모두가 손을 맞잡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결말이 그렇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기에 살짝 스포를 하고 들어가자면, 이들은 대회에 출전해 당당히 메달을 목에 건다. 수중발레팀 팀원들은 게이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고 무시당하던 수중발레 대회에서 당당히 메달을 쟁취하며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티에리가 자신을 무시하고 놀리던 수구 팀 선수들 앞에서 메달과 트로피를 자랑하며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혓바닥을 내미는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에게 더 큰 통쾌함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은 도입부와 같이 베르트랑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데, 영화는 맑은 하늘 아래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베르트랑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동그라미도 '의지만 있다면' 네모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겐 이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그들에게 안겨준 성공이 결국은 이 사회의 '구태의연한 성공의 논리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난 사실 영화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랬다.
동그라미는 네모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내가 왜 들어가야 되는데?
하지만 이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들어가야 하냐고 이유를 자문한다는 것은, 결국 자포자기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노력'의 의미를 아예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함께 노력의 의미를 깨달았고, 모두가 함께 하늘이 기분 좋게 내어준 7할의 '운'을 감사히 받았다. 어쩌면 그들은 네모로 들어가기 위해 네모가 된 것이 아니라, '의지'만 있다면 동그라미로도 네모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는 말도 그런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 첫머리에서는 네모 역시 절대 동그라미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지만, 마지막에는 네모도 동그라미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라는, 성공을 '쟁취'하는 세상이 아닌 '감사'할 줄 아는 세상을 향한 동경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운칠기삼인 이 망할 놈의 세상, 언젠가 우리 앞을 찾아올 그 '운'을 감사히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30%만 노력하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헤엄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