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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09. 2024

솔직한 자만이 노래할 수 있다

영화 <백조의 노래>

#.

나는 죽을병에 걸렸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반려견을 두고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금의 슬픔도 안겨주고 싶지 않은 나는, 나와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만들어 준다는 연구소를 찾는다. 내가 살아온 인생 속 모든 기억은 물론, 아주 작고 사소한 내 습관까지 똑같이 빚어낸 또다른 '나'. 앞으로 이 존재가 나를 대신할 것이다 이로써 내 가족들은 아무런 아픔도 모른 채 계속해서 '나'와 행복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물론 나는 세상과 단절된 저 뒷편에서, 홀로 오롯이 그 고통을 안고 살다가 떠날 것이다. 어차피 곧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나일진대, 슬픔을 오롯이 나 혼자 안고 떠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오히려 누구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날 수 있다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그렇게 다 잘 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분명 세상에 '나'는 없는데, '나'는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테다. 복제된 '나'를 보며 나를 대하듯 살갑고 따뜻할 내 가족들을 생각하면 행복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도대체 '나'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내 삶은 끝난 것인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영화 <백조의 노래>는 주인공 캐머런 터너(마허샬라 알리)에게 이렇게 가혹한 상황을 안긴다. 당신에게 이런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에서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당신은 사라지지만 세상 속 당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실로 인한 조금의 상처도, 아픔도 주지 않을 수 있다. 길게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내 병세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눈치 채는 순간, 천금같은 기회는 순식간에 날아가버린다.


 '죽음'이라고 하는, 숨쉬고 있는 이들은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그 미지의 세계를 혼자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길을 선택할까.


처음 이 영화 속 선택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당연히 그 기회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래도록 살을 부대꼈던, 아끼는 이의 '죽음' 이라는 사건은 받아들이는 이에게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비용으로 요구한다.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내 마음은 분명 그들이 어떤 상처도 받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고 갈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도 고민과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그것을 '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배'로 늘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로써는 더욱이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과 마음 깊이 '이별'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시작'이 중요한 만큼 '끝'도 중요한 법이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느끼는 그 감정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올바르게 해소되고 마무리될 때 인간은 한 단계 성장한다. 그리고 그 언젠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기체들은 소멸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고통을 경험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그리고, 영화 속 캐머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캐머런은 복제 인간을 만든 결심을 하고 처음 또 다른 자신과 마주했을 때 그가 프로그램 진행을 주저하고, 자신의 아내와 사랑스런 말투로 통화하는 내 복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치미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분명한 건, 그것이 한낱 '질투'에 사로잡힌 일차원적인 분노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캐머런이 그 광경에서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 꼬옥 닮은 자신의 클론을 통해 '내가 아닌 나'를 바라보며 내 주변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저편의 그늘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 '나'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사라진 후 남게될 주변의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걱정어린 시선이 복제 인간 제작의 이유인 것처럼 말하는 캐머런의 말들은 한낱 변명일 뿐이었다. 클론이 나를 대체한다는 이 선택의 권리에서 파생된 모든 죽음에 대한 고민은 시작부터 끝까지 캐머런 그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버거워할 이들에 대한 걱정 뒤에 숨어,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과정은 주변인들에게도 물론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분명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곧 찾아올 크나큰 상실과, 그로 인해 찾아올 공허함과 그리움을 위해 떠날 사람과 이곳에 남을 사람이 함께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복제 인간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 혼자 남은 '나' 홀로는 아무것도 정리할 수 없다. 


서두에서 고민한 내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여기서 해야할 진짜 고민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백조의 노래'는 관용어로 많이 사용되는 말로,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의미한다고 한다. 평소 울지 않는 백조가 죽기 직전에는, 단 한 번 울며 노래한다는 속설에서 유래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백조와 같은 처지의 캐머런도 자신의 죽음을 마음 깊이 느끼고 슬퍼하며, 진한 눈물을 흘릴 시간이 필요했다. 내 죽음을 숨김으로써 그들의 슬픔을 지워주고 싶다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었다. 


영화의 결말에서 캐머런의 선택은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마무리되지만, 결국 그는 가족들에게 이별을 위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백조의 노래'란 결국, 남은 감정을 오롯이 분출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인생 자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가닿다 보니, 캐머런의 시선을 통해 나까지 돌아볼 수 있었다. 난 항상 스스로를 타인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그것이 너무 과하다보니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잃는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가 일상에서 보이는 그 크고 작은 배려들은,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내 진심이 나와 함께하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못내 불편했던 이런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나쁜 것은 외면하고 가리며 항상 좋은 부분만 보고, 또 보이고 싶은 그 마음조차 이타심이 아닌 이기심일 수 있었다. 내 진심을 보길 원하는 이들에게조차 난 그것을 가리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왜 난 매순간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서, 왜 항상 타인이 중심에 있는 척 행동하는 것일까. 


캐머런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을 때, 난 기꺼이 내 인생을 한 곡의 '백조의 노래'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내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난 홀로 남게 될 테다. '진심'을 빙자해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안기는 일도 지양해야겠지만,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진심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무례일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나눈 이에게 '솔직함'을 잃지 않는 것이 짧고 외롭기만 한 사람의 일생을, 나아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일생을 조금이나마 더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방법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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