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돈'보다 아름다워

영화 <미스 슬로운>

by 정주원

#브런치무비패스 를 통해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2.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세상에 과연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정언명령은 진리에 가장 '가까운' 인간 사회의 규칙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항상 저 말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들의 이야기다. 로비의 사전적 정의는 '특수한 이익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직ㆍ간접적으로 일정한 대상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기술과 자원을 포함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어찌 보면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속물적인 직업이다. 정언명령을 지키기 가장 힘든 직업군 중 하나일 것이다.

<미스 슬로운>은 그런 로비스트들의 영화다. 중력의 비밀을 깨닫고 '유레카'를 외치던 제시카 차스테인이 이번에는 냉정하고 명석한 로비스트로 분했다. 슬로운과 로비스트들은 고객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다양한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세운다. 한 가지 이슈를 두고 대척점에 있는 두 로비 집단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작전들은 132분을 빈틈없이 꽉 채운다. 그 과정에서 슬로운은 정언명령이 추구하는 가치로 인해 고뇌한다. 그 누구보다 똑똑해야만 하지만, 그 누구보다 속물적이어야 하는 슬로운의 마지막 선택과, 반전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울림을 가져다준다.



1. '로비스트' 슬로운


슬로운은 워싱턴 정가의 거물급 로비스트다. '승리'를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인물이다. 슬로운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각성제를 먹으면서 일할 정도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냉철하고 치밀한 전략을 구사한다. 항상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때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진정한 승부사다. 그런 그녀에게 미 의회의 거물급 인사인 밥 샌포드 의원이 찾아온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인 '히튼-해리스'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총기 업체를 대변하는 막강한 부를 가진 이익집단의 로비스트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 매력적인 제안을 슬로운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녀에게 인간스러운 면모도 남아 있는 것일까. 그녀는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히튼-해리스' 법안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녀는 '승리'를 좇는 사람일지언정 '돈'만을 좇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몸담고 있던 워싱턴의 잘 나가는 로비회사 '콜-크래비츠 워터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신념대로 '히튼-해리스'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비영리 집단이 고객인 소규모 로비 회사 '피터슨 와이트'로 옮기려 한다. 그녀가 갑작스레 이런 결정을 내리며 승승장구하던 슬로운의 팀은 둘로 쪼개어진다. 오직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은 슬로운의 적이 되어 회사에 남는다.


수정헌법 제 2조.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히튼-해리스 법안을 반대하는 ‘콜-크래비츠 워터맨’이 내세우는 헌법 조항이다. 미국 국민이 스스로 본인을 방어할 권리인 '무기를 휴대할 권리'를 히튼-해리스 법안이 침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강력한 헌법의 가치 뒤에는 깨끗하지 못한 '돈'의 논리가 숨어있다. 막강한 부를 쥔 총기 회사를 비롯한 이익 집단들은 총기 소유가 더 자유로워질수록 더 큰 이득을 보게 된다. 헌법이 수호하는 그 가치 때문에 총기 사고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많은 무고한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고 있음에도 그들이 아랑곳 않는 이유다. ‘피터슨 와이트’는 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취약하지만,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비영리 집단의 편에 서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슬로운은 '돈'과 '이익'으로만 이야기하는 로비스트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멋진 여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슬로운은 '승리'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물론 그녀는 돈이 아닌 스스로 옳다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도덕적인 가치 때문에 유리하고 달콤한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승리를 위한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튼-해리스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피터슨 와이트에 모인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분별한 총기 사용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지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슬로운을 따라 회사를 옮긴 다른 팀원들도 그렇다. 하지만 슬로운에게 그런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승리하기 위해 본인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같은 팀원들조차 속인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그녀가 로비스트로서 일하는 방법이다. 물론 승리에 대한 욕망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니까. 하지만 정언 명령 1번이 말하는 것처럼 욕망 자체가 보편적 준칙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승리‘라는 본인의 준칙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움직인다.



2. '로비스트' 슬로운 vs '인간' 슬로운


승리만을 향해 거칠 것 없이 내달리는 슬로운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은 물론 심지어 동료도 소모품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정언명령 2번에 완벽히 반하는 행동을 했고 사건은 터지고 만다. 슬로운의 이 대사에는 목표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이기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 임무는 이기는 거고, 난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책임이 있으니까. 그걸 이용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나 다름 없어."


피터슨 와이트에서 슬로운의 팀원 중 한명인 '에스미'는 총기 규제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학살 사고의 생존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동정을 얻고 싶지도, 그것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 때의 감정만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눈치빠른 슬로운에게도 그 사실을 언론에 말하지 않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승리를 위해 '에스미'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생방송에서 언론에 폭로한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승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에겐 '직무유기'니까. 그것이 ‘인간‘이라도 소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언론의 무게중심을 총기 규제 찬성으로 옮겨오며 완벽하게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피터슨 와이트의 사람들은 오히려 슬로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슬로운의 전략으로 3백만의 기부자들을 확보하고, 많은 기부금을 모았지만, 회사의 아무도 그녀의 성공을 반기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하는 동료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피터슨 와이트의 사장 슈미트는 표결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한 상원 의원의 도덕적 허점을 공략하기 위해 불법적인 감시를 하려고 하는 슬로운을 막아세운다. 콜-크래비츠 워터맨이었다면 오히려 그녀를 더 밀어줬을 것이다. 그곳에선 슬로운의 승리와, 그들의 돈이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일하는 이곳은 부도덕한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성공이라는 결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부적절한 과정의 문제는 그녀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로 만든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만 믿지 않는다.'


슈미트가 슬로운을 스카웃해오면서 그녀에게 해준 말이다.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준칙'을 준수하며 승리했느냐가 이곳에서는 중요하다. 여기서 그녀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3. '인간' 슬로운


부도덕한 방법으로 승기를 잡은 슬로운은 적들에게 똑같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역공을 맞는다. 총기사건 생존자인 '에스미'를 전방에 내세워 여론 몰이에 성공하고 법안 통과까지 성공적으로 가는 듯 했다. 하지만 콜-크래비츠 워터맨은 또다른 음모를 꾸민다. '에스미'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고, 위기의 순간 정의로운 시민이 '총'으로 그녀를 구해내도록 사건을 하나 만들어낸다. 혜성처럼 나타난 정의로운 시민 프랭크로 인해 히튼-해리스 법안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또다른 사람이 승리를 위한 소모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로 인해 총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휴대하게 하여 스스로 혹은 타인의 안전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콜-크래비츠 워터맨'의 직원들은 슬로운을 아예 완전히 짓밟기 위해 그녀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다. 이전에 본인들과 함께 일할 때 상원 윤리위원회의 규정을 어긴 슬로운의 행적을 문제 삼아 그녀까지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회의 스펄링 의원과 어두운 방법으로 결탁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로비를 한 그녀를 청문회에 세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슬로운. 여기서 그녀는 변하기 시작한다. 본인의 안일한 결정과 행동때문에 큰 상처를 받은 '에스미'로 인해서 큰 갈등을 겪던 슬로운. 그녀는 정의롭지 못했던 그녀의 과거와도 싸워야 한다. 그녀는 변호사의 조언대로 침묵으로 그것을 외면할 수도 있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전자를 선택했겠지만 그녀는 후자를 선택한다. 스스로를 승리의 제물로 바친다. 청문회에서 스스로 자신의 비도덕했던 행위를 인정한다. 물론 정언명령은 자기 자신도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수단'이 되기로 한 데에는 속죄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껏 본인의 승리라는 가치 아래 수단으로서 소모된 에스미를 비롯한 사람들과 스스로의 행동에 속죄하는 마음. 그리고 진정 '인간' 슬로운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다.


'이 나라는 썩었어요. 양심 있는 의원에게 보상하지 않고 쥐 같은 자들에게 보상하죠. 자기 자리만 보전하면 나라도 팔아먹을 자들이에요.'


슬로운은 청문회에서 자신서 죄를 인정하고 과거의 자신과, 지금 슬로운의 반윤리적 행위를 지적하는 더 반윤리적인 스펄링 의원을 향해, 또 나라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슬로운은 자신을 제물로 삼아 스펄링 의원의 부정결탁을 들춰내는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그렇게 그녀는 히튼-해리스 법안을 지켜낸다. 하지만 슬로운은 과거의 반윤리적 행위로 인해 5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승리를 거뒀다. 지금까지 그녀가 거두었을 수많은 승리들보다 훨씬 더 값진 승리를.


우리가 지금 속해있는 사회도 '로비스트'들이 마주하는 사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번뜩이는 머리싸움과 설전, 그리고 전략을 넘어 우리에게 한 가지 메세지를 전달한다. 항상 본인의 가치를 '보편적 가치'에 맞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모든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새삼 정언명령의 문장들에서 무한한 무게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사람은 꽃보다, 돈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p.s 총기 없는 대한민국에 사는게 마음은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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