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보다, 한 마디 말보다 강한 신뢰

영화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

by 정주원

이 땅이 일본에 의해 억압당하던 일제 강점기 시절.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생소한 외국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배설이라는 어엿한 한국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이 영국인은 우국지사 양기탁 선생과 함께 <코리아 데일리 뉴스> 신문을 창간해 일제의 만행에 대한 진실을 고발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한 사람이다. 이른바 총칼이 아닌, 펜 한 자루로 항일 운동을 펼친 분이다.

이렇듯, 펜 한 자루가 가지는 힘은 수많은 총, 칼보다 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국내를 보면, 최남선이 작성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어느 이름 모를 청년이 목청껏 읽어 내려간 '기미독립선언서'는 민중을 하나로 모아 그 유명한 3.1 운동에 불을 지폈다. 외국을 봐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인권선언문'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글은 1789년 프랑스의 시민 혁명을 이끌었다. 물론 나치의 정신 아래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하나로 묶어낸 히틀러의 심복 괴벨스도 있지만 말이다.


"말은 권력이고 힘이야. 어떤 미친놈이 깡패가 한 말을 믿겠나."

지금 이야기할 영화 <내부자들>에도 말과 펜의 힘을 믿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유력지 조국 일보의 논설 주간 이강희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위의 저 대사는 이강희가 안상구가 터뜨린 비자금 파일 때문에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을 때, 검사 우장훈을 향해 던지는 대사이다. 이강희는 펜의 힘을 믿지만, 그 힘은 부패한 재벌, 정치권력과 함께 움직인다. 어니스트 베델이나 '기미독립선언서' 보다는 괴벨스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속의 비리와 의혹을 모두 볼 수 있어 답답하지만, 어떻게 보면 현실의 우리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안의 대중들은 이강희가 신문에 적는 한 마디 말, 뉴스가 전하는 한 마디 말에 속된 말로 놀아난다. 이는 이강희가 영화에서 대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뭐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실제 교육부의 정책기획관이 뱉은 말로 더 유명해진 이 대사.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강희가 통화 중에 '끓을 땐 금방 끓고 식을 땐 금방 식는다'라고 표현한 우리나라의 민족성. 영화에서 이강희가 묘사하는 대한민국 대중들에 대한 말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한편으로는 아플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중에서도 이 글에서 곱씹고 싶은 대사는 이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이 대사에서는 이강희가 대중을 하찮은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 외에 또 한 가지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신뢰'의 부재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이, 그렇게도 언론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팩트'는 그에게 휴지조각일 뿐이다. 그저 대중이 원하는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고 자기들끼리 물고 씹고 뜯게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영화 속 세상은 진실은 철저히 숨겨진 채, 대중이 원하는 허울 좋은 거짓말들이 판을 친다.

아마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한 가지 느낌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특히 이강희를 필두로 유착되어 있는 부패한 정계, 재계 인물들을 보면 더 느껴진다. 눈을 보고 대화하면서도, 통화를 하면서도 등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함께 술을 마시며 우리가 함께이기에 온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것이며, 끝까지 함께 가자며 겉으로는 둘도 없는 사이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깊숙이 속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우정은 사상누각이다. 그들의 말과 달리 그들이 쌓은 탑은 '같이' 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쌓은 것이다. 이강희 자신의 한 마디 말의 힘에서, 오현수에겐 자신의 돈에서, 장필우에겐 자신의 인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뤄 놓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배신을 행할 수 있다. 손이 잘린 이강희가 우장훈의 협박에도 장필우를 믿었다면 우장훈이라는 내부자를 들이는 악수를 과연 두었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또 다른 세력인 우장훈과 안상구는 다르다. 신뢰가 전혀 없는 이강희 일당에게서 신뢰를 구하다 버림받은 안상구. 그는 오른손이 잘린 후 당연하게도 강박적으로 신뢰를 갈망한다. 애초에 깡패와 검사라는 절대 신뢰로는 엮일 수 없는 두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엔 서로를 계속해서 경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둘은 서로를 믿는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안상구가 주저하지 않고 우장훈을 이강희의 오른팔로 만드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내부자를 심는 그들의 계획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두 세력의 성패를 가른 건 '신뢰'의 유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상구와 우장훈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행동은 부패한 언론, 재벌, 정치를 때려잡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 하지만 가장 처음 그들의 의도 역시 우장훈도, 안상구도 모두 출세였다. 그들의 정의로움은 영화 마지막에 그들이 한 선택으로써 완성된다. 쌀밥보다 콩밥이 다 좋다는 안상구, 스스로 제2의 장필우가 될까 정계에 진출하려 하지 않는 우장훈.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한잔 하자는 그들의 말이 너무 낭만적인 엔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선택을 통해 정의의 사도로 남을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재미는 이강희와 안상구의 비교에서 나온다. 이 두 사람은 <내부자들>에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다. 칼과 도끼, 주먹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안상구와 펜과 한 마디 말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이강희. 표준말을 사용하며 어렵고 격식 있는 어휘를 구사하는 이강희와 달리,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욕설 일색의 말투를 사용하는 안상구. 이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인물은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건 각자의 도구를 쥐고 자신의 힘을 사용하던 '오른손'이 잘려나간 후 그들이 보인 행동이다. 안상구는 신뢰를 찾아가는 길에 우장훈을 만나 개인적으로는 이강희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는 진실을 알리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 하지만 오른손이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장필우를 배신한 이강희는 끝까지 장필우를 비롯한 주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 채 내부자를 안으로 들이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한다. 옛말에도 있듯이,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매우 보인다. 안상구의 도끼와 대치하던 순간에 도끼를 쥐고 있던 안상구의 손을 찌른 건 다름 아닌 이강희의 연필이었다. 신성한 언론의 논설을 작성하는 연필에 더러운 피를 묻힌 결과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위에서 이 영화의 엔딩이 너무 낭만적이게 보인다고 말했지만, <내부자들>은 마지막까지 현실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완벽한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권선징악을 위해선 악인이 죽음을 맞거나, 혹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선한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결과적으로 이강희가 벌을 받았지만, 대중들을 대하는 이강희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악인으로 날아오를 또 다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벌했음에도 벌하지 못한 것 같은 무력함이 느껴진다.


어니스트 베델의 펜과 이강희의 연필은 모두 민중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극명히 다른 영향을 끼친다. 현실의 모든 일들이 영화나 소설처럼 '권선징악'으로 끝나진 않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수의 민중에 대항한 소수의 악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악'에는 '신뢰'가 뒷받침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협력보다는 배신이 더 유리하다는 죄수의 딜레마처럼 말이다. 영화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민중들을 위해 씌여지는 펜은 이강희의 연필처럼 악인이 본인의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중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펜을 들었던 어니스트 베델의 펜과, 우장훈과 안상구처럼, '진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씌여지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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