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청춘들의 러브스토리

영화 <중경삼림>

by 정주원

지금은 IPTV와 VOD의 등장으로 모두 사라져 전설처럼 존재하지만, 어린 시절 동네마다 하나씩은 꼭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비디오 대여점을 뻔질나게도 드나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슈퍼 앞 100원짜리 게임기 앞을 떠나지 못할 때, 나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았다. 항상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갔던 건 아니었다. 돈도 없이 그곳에 가서는 책꽂이에서 비디오들을 꺼내 앞 면의 영화 포스터와 뒷면의 줄거리를 훑었다. 아마도 그때의 그 습관이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7~8살의 어린 내게 홍콩 영화는 액션, 성룡 두 단어로 설명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성룡의 열혈 팬이셨던 외할머니께서는 성룡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많이 보셨는데, 내가 할머니께 뭘 보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항상 내게 '홍콩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내게 홍콩 영화는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달리는 차 위에서 악당과 무술 대결을 펼치는 오락 영화였다. <중경삼림>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는다. 내게도 그렇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내가 끼고 있던 홍콩 영화에 대한 색안경을 벗겨서는 짓이겨버렸고, 더 나아가 '색채의 아름다움' 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의 한 자리에 '홍콩 여행'을 떡하니 차지하도록 했다. 지금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을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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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영어로는 Chungking Express.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홍콩의 침사추이 지역에 가면 '중경대하'라고 하는 낡은 건물이 있다. '우범지역'으로 유명한 이 곳은 영화를 봤다면 더 잘 알겠지만 인도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혼란스러운' 곳이다. 영어 제목의 Express는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또 다른 곳이다. 바로 'Midnight Express'. 영화 속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패스트푸드 가게의 이름이다.

영화의 제목을 건물과 공간으로 정한 것처럼, 이 영화는 서사보다는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풀어나간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chungking_mansions_hong_kong345324.jpg 중경대하. 외양이 '혼란스러움'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두 남자는 모두 경찰이다. 이름도 없다. 사복경찰 223과 정복경찰 663. '민중의 지팡이'로서 이 복잡한 곳의 치안과 질서를 책임져야 할 두 경찰의 심리상태는 이 건물보다 더 혼란스럽다. 그들은 이 곳에서 사랑을 보내고, 사랑을 찾는다. 이것이 스토리의 전부다. <중경삼림>의 가장 큰 특징은 '별 얘기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저 며칠간 두 남녀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영화를 찾게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겨 있는 더 복잡하고 더 혼란한 그들의 감정들 때문이다. 사랑은 인류에게 남아 있는 가장 어려운 마지막 숙제와도 같다. 그 누구도 뭐가 정석이라고 말할 수 없고, 똑같은 사랑이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도 하지만, 피폐하게도 한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이 사랑이다. <중경삼림>은 일련의 헤어짐과 만남 속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감각적이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래서일까, 더 혼란한 사랑일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사랑 이야기를 계속 찾게 되는 이유가.


1. 사복경찰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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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경찰 223은 떠난 여자 친구 '메이'를 그리워한다. 매일 저녁 전화에 대고 호출기 암호인 '널 영원히 사랑해'를 부르짖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223은 그런 메이를 그리워하기 위해, 또 잊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Midnight Express' 앞의 공중전화를 붙잡고 메이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며 귀찮게 하기도 하고, 5년 전 결혼한 일본 친구에게까지 전화를 해 술을 먹자고 한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조깅을 하며 온 몸의 수분을 없애려 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일인 까지가 5월 1일까지가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모으며, 한 달 30개의 통조림을 모으는 날 그녀를 잊기로 하기도 한다. 듣기만 하면 매우 사소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절대 그 행동들을 유치하게 여기지 않는다. 떠나간 애인에 대한 그리움,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의 무력감이 장면들을 통해 잘 표현된다. 통조림들을 바라보며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그의 대사는 가슴을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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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어느 술집에 들어선 223은, 저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첫 번째 여자를 사랑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레인코트에 빨간 선글라스를 쓴 묘령의 여인. 마약 밀매를 하는 그녀는 오늘 배신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낸 그녀에게 왠 어리숙한 경찰 하나가 추파를 날려온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들이 사랑에 빠져 아름다운 하룻밤을 보내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밤을 보낸 그들의 모습에서 여운은 더 크게 느껴진다. 다른 사랑을 통해 '메이'를 잊고자 했던 223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아름다운 그녀의 구두를 닦아주고는 호텔방을 나온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자 한 것일까. 그리고 그는 비가 퍼붓는 운동장을 계속해서 전력으로 뛰어다닌다. 하지만 계속 내리는 비는 223의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끝까지 '메이'로 인해 슬퍼하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게 223의 운명인 것처럼. 영화에서 223의 이야기는 새드엔딩이었지만, 그에게 찾아올 다음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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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복경찰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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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인 또 다른 경찰은 유니폼을 입은 정복경찰 663이다. 아름다운 스튜어디스와 사랑스러운 연애를 이어가던 663도 그녀와 실연을 맞는다. 당신의 비행기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한 마디 편지와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던 그의 아파트 열쇠를 'Midnight Express'에 맡기고는. 매일 663이 그녀에게 샐러드를 사다 주던 그 음식점에 말이다. 그런 663의 복잡다단한 감정은 경찰 유니폼을 벗어던진 그의 아파트 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663은 그녀가 떠나간 자기 아파트에 스스로의 아픈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다 써버려 얇아진 비누를 보며 그녀가 떠난 뒤 야위었다고 비누를 위로하는가 하면, 창가에 널어놓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행주를 보며 그만 울라고 말한다. 속옷만 입은 채 집 안의 사물들을 위로하는 663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사가 반쯤 나간, 얼빠진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위의 223에서 처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보며 663의 슬픔에 더 공감한다.

6632.jpg 자신감을 가져

그런 그에게 'midnight Express'의 여종업원 페이가 등장한다. 매일 밤 나타나는 663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페이는 우연히 그의 아파트 주소를 알게 되고, 매일 몰래 일을 나간 663의 아파트에 머무른다. 슬픔에 가득 찬 663의 머릿속을 대변하는 그의 아파트에 새로운 여자가 등장한 것이다. 페이는 그의 아파트에서 있는 시간을 '꿈을 꾸는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말이다. 좋아하는 663의 아파트에서 머무르는 꿈만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는 663 없이 오롯이 혼자만 '꿈을 꾸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페이는 언젠가부터 그곳에서 663의 전 애인의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낡은 비누와 행주, 슬리퍼는 치우고 새 것으로 바꾼다. 새로 금붕어를 채워 넣는다.

663도 어느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바뀌는 집의 모습을 감지한다.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지만, 다시 살이 찐 비누, 너덜너덜한 행주에서 깨끗해진 행주로, 깔끔이 정돈되어 있는 인형들을 보며 그것이 싫지는 않은 것처럼 말한다.

tneh.jpg 내가 물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나? 아니면 이 방에 감정이 생기나?

어느 날 페이가 실수로 수도꼭지를 틀어놔 663의 아파트가 온통 물바다가 된다. 온통 물바다가 되면서 페이가 소파 뒤로 던져 놓았던 예전의 그녀와의 기억이 담긴 슬리퍼도 소파 밑에서 거실 앞으로 흘러나온다. 663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한바탕 크게 울고 난 그의 아파트는 추억에 직면하고 한 바탕 크게 울고 나서 오히려 후련해지는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이후 663도 점차 전 애인의 추억을 잊어나가기 시작한다. 집을 통해 663의 감정 변화를 너무나도 감각적으로 잘 표현한 부분이다. 계속 몰래 자기 집을 찾았다는 사실을 안 663은 페이를 무단 가택침입으로 체포하는 대신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는 오랜 격언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결국 마지막에 이 둘은 만나게 되고, 이 남녀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위에서도 간략히 설명했듯이 이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 만으로 리뷰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왕가위 감독만의 영상미와 명장면과 명대사, 음악들을 이 리뷰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그래도 모쪼록 이 리뷰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와,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찾게 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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